(12년간의 그림체 변화. 그리고 배경을 잘 보면...)

원제는 <요코하마 장보기 기행(ヨコハマ買い出し紀行)>인데, 아무래도 한국에서 잘 쓰이지 않는 단어라 그런지 <카페 알파>로 번역되었다. 오히려 이 제목이 나은 듯. (영어로 번역된 제목은 <Quiet Country Cafe>라고 한다.)

이 만화는 먼 미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바다의 수위가 점차 상승해 많은 땅이 물에 잠겨 인류 문명이 "황혼"에 접어드는 시대에 로봇인 '알파'가 운영하는 찻집 '카페 알파'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을 그리고 있다. 흔히 말하는 '치유계 만화'라는 장르라 할 수 있는데, 큰 사건이나 갈등 같은 건 없지만 알파와 주변 인물들이 보여주는 평화로운 삶의 모습이 만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994년부터 2006년까지 연재되었다고 하며(영문 위키 참조), 단행본은 14권으로 완결되었으니 대충 1년에 단행본 한 권씩 나온 셈이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을 그리는 작가의 그림이나, 빛, 냄새, 소리 등 감각적 요소에 대한 묘사, 담담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묘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파의 긔여운 (...) 모습 등 사람의 마음을 느긋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만화라고 할까.

작가가 작품 안에 수도 없이 많은 떡밥(...)과 의문점을 뿌려 놓았는데, 이 중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시피하여 독자들은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거나, 그냥 그려러니 -_- 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들이 많다. 어차피 세세한 설정보다는 분위기를 즐기는 작품이니.

몇 가지 내 감상을 말해 보면... (내용 누설이 있을지도? 뭐 추리 소설도 아니고 어찌 보면 뻔한 내용이니까.)




1. 시간의 흐름
주인공 알파는 로봇이라 늙지 않고 수명이 길기 때문에(작중 로봇의 묘가 나오기도 한 것을 보면 영원히 사는 것 같지는 않지만, 굉장히 오래 살 수 있는 듯하다) 내용이 진행될수록 (알파는 그대로인데) 주변 환경이 변하고 인물들이 나이를 먹는다. 이게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소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유소 할아버지나 의사 선생님 등 노인들이 가끔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이나, 타카히로와 마키가 성장해 어른이 되고, 14권에 무덤 두 개가 등장하는 등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물들의 변화나 그에 관한 추억이 자주 보인다.


(첫 화에 등장하는 원두가게 주인. 도저히 연령을 가늠할 수 없는 외견이라... -_-)


(마지막 화에 등장하는, 치매에 걸렸는지 헤롱거리시는(...) 원두가게 주인. 주름살도 생기고 머리도 희끗해진 듯.)

작중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추측할 수 있게 해 주는 떡밥(...). 첫 화의 원두가게 주인이 2~30대(부록에 이 사람이 '가끔 원두 사러 오는 녹색 머리 아가씨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_- 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는 걸 봐서 대충 이 정도 나이로 잡으면), 마지막 화에서 70대 정도로 추측하면 대략 5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것 말고도 타카히로의 키가 크는 것이라던가, 카페가 태풍으로 작살나고 복구된 후 보면 창가에 화분이 있는데, 이게 점점 자란다던가... 하는 것들도 있다.

무엇보다 이런 '시간의 흐름'에 대해 알파가 직접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는데, 알파는 인간들의 시간의 흐름을 '배'에 비유하며, 자신은 모두의 배를 강가에서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 끝날 때쯤 나오는데, 어른이 되어 마을을 떠난 타카히로와 마키가 탄 비행기가 알파네 마을을 지나가고, 이를 보며 알파가 반가운지 슬픈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든다... 그리고 후반에 마키가 카페 탁자에서 잠들었을 때, 알파가 마키의 어린 시절 모습과 지금 보이는 마키의 모습을 비교하며 '빠르다. 너무 빨라.'라고 생각하며 눈물짓는 모습이라던지,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는 알파의 감정이 드러나는 장면들이다. 알파는 독자들처럼 인류의 '시대의 황혼'을 관조하는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2. 기억
작중에서 상당히 자주 등장하는 떡밥인데, 가로등의 모습을 한 식물이나, 어린아이의 얼굴을 한 버섯, 전망이 좋은 곳에 마치 풍경을 바라보듯 자라난 식물, 건물처럼 희고 네모난 모습을 한 버섯 비스무리한 무언가 등이 나온다. 이를 두고 '저물어 가는 인류에 대한 지구의 기억'이라고 하는 묘사가 나온다. (이걸 보고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가 떠올랐다. 혹시 지구의 수위가 상승하여 솔라리스가 되는 거 아닐까 -_-) 이것과 위에서 말한, 인간의 황혼을 관찰하는 알파. 의사 선생님이 알파에게 물려준 '둘러보며 걷는 자'라는 뜻의 목걸이. 그리고 알파가 본 것들을 기록하는 카메라. 바닷속에 가라앉았지만 아직도 남아 밤이면 빛나는 도시. 주유소 할아버지와 의사 선생님과 함께 '추억의 속편'을 만드는 것. 등등 기억과 추억에 관한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이렇게 보면 이 작품을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기억을 쌓아 가는 과정'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3. 감각
작중에서 야경, 바닷가나 숲의 냄새, 낡은 레코드 등 감각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알파의 친구인 코코네가 로봇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 알아보다가 로봇의 모델명이 붙은 오래된 레코드를 발견하고 들어 보거나, 의사 선생님이 과거에 로봇 연구에 참가하여 '극한의 상황에서 목표에 이르렀을 때의 감각'에 대한 데이터를 얻기 위해 호버크래프트로 600km/h의 속도를 낸다던지 하는, 로봇의 개발에도 이러한 '감각'에 대한 탐구가 연관되어 있다는 떡밥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코코네가 레코드를 발견한 다음 화에서 (제목도 <레코드 III>이다) 두 노인이 배를 타고 바다에 반쯤 가라앉은 가로등 불빛을 보며 식사를 하는데, 이 때 이런 대화를 나눈다.

"어쨌든 묘하군-. 이런 하찮은 걸 보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나도 그렇다네. 사람이란 왠지 그 뿌리가 빛이나 음 같은 걸로 움직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리고 코코네도 레코드를 발견하고서 '내 핏속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는지도-' 라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나, 알파에게 '우리는 소리나 냄새로 되어 있어요. 비유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라고 말하는 것 (여기에 알파는 '나도 알아...' 라고 대답한다.) 등, 사람은(그리고 로봇도) 그 근원이 빛, 소리, 냄새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나온다.

한편, <카페 알파>와 비슷한 치유계 만화로 <아리아>라는 작품이 있는데, <아리아>의 전작 격인 <아쿠아>를 보면 주인공 아카리가 선배 아리시아와 불꽃놀이를 보며 이런 대화를 한다.

"... 불꽃놀이를 보는 때라던가, 풍경소리를 듣는 때라던가, 바람을 느끼는 때라던가, 곤돌라를 저을 때라던가, 가끔씩 가슴이 욱신거릴 때가 있어요. 너무나 즐거운데도 어딘가가 아파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그건 분명, 그리워서일 거야."

이 두 장면을 합쳐 보면 재미있는 결론이 나온다.

'사람은 그 뿌리가 빛이나 소리, 냄새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감각을 경험하면 그리움을 느끼는 것이다.'

뭔가 감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명제다(...)

4. 수많은 떡밥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작가가 수많은 떡밥을 던져 놓은 채로 완결을 내버렸기 때문에, 밝혀지지 않은 요소가 굉장히 많다. (작가가 평생 연재하려다(...) 건강 문제로 급히 완결지었다는 말도 있는데, 루머인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위키피디아에도 그런 떡밥들이 정리되어 있을 정도다. (http://en.wikipedia.org/wiki/Yokohama_Kaidashi_Kikou)

예를 들면

- 알파의 주인인 오너(하츠세노 씨)는 알파를 두고 여행을 떠났다고 하는데, 왜 돌아오지 않으며 정체가 뭔가?
이에 대해 작중 다른 노인들처럼 요단강 여행(...)을 떠났다는 설도 있는데, 방랑 여행을 하는 아야세가 '하츠세노 선생님의 소개로 왔다'는 말을 하거나, 알파에게 택배로 카메라와 메시지를 보내 주거나 하는 일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다.

- 인간의 모습을 하고 물가에 살며,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미사고'의 정체는 무엇인가?
타카히로, 마키, 아야세, 나중에는 타카히로와 마키의 아이도 어렸을 때 미사고를 만나는데, 이들이 성장한 후 미사고는 이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늙지도 않고. 아야세는 '로봇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있었다고 한다'니 로봇은 아닌 듯한데.

- 6년마다 북반구와 남반구를 오가는 거대한 비행기 '타폰'
여기에는 인간 몇 명과 '알파'라는 로봇이 타고 있는데, 주인공 알파와 닮은 데다가 의사 선생님과 같은 목걸이를 하고 있고, 의사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는 듯하다. 의사 선생님의 회상에 따르면 알파형 로봇의 조상 격이라고 하는데. 타폰에 왜 이들이 타고 있으며, 타폰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물론 밝혀지지 않았다. 타폰 안에서 아래 세상을 내려다본다던가, 강하용 보트도 있고 사람들이 알파에게 '나중에 우리가 사라지면 아래에 내려가 봐요'라는 등의 이야기도 한다.

- 로봇이 만들어진 이유
작중 세계에서 딱히 로봇이 인간에 비해 차별받는다거나 하는 것도 없고, 똑같이 일하고 먹고 자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 여자 로봇이고, 남자 로봇은 드물며 일찍 죽는다고 한다.

- 지구의 수위가 상승하는 이유
과거 어떤 사건이 있었길래 인류 문명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왜 지구의 수위가 상승하는 것인가? 그리고 지구의 수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상승하는 것인가? 주유소 할아버지가 알파에게 "... 자네 집도 파도에 쓸려갈 거고. 여기(주유소)는 높으니까 나중에 여기 와서 가게를 차려도 돼." 라고 하는 것을 봐서 계속 상승하는 것 같지만, 마지막 화에서 알파가 "훗날 '황혼의 시대', '저녁뜸의 시대'라 불리게 되는..."이란 회상을 하는 것을 보면 언젠가 수위 상승이 멈추고 인류 문명이 유지되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만약 수위가 계속 상승하는 것이라면 로봇의 수명이 무한하더라도 결국에는 인류와 함께 멸망하게 되는, 꿈도 희망도 없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건데...



...이런 떡밥은 독자 각각의 상상에 맡기는 거니까.


알파라는 주인공의 매력과 아름다운 풍경 묘사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작품.
마음의 안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 강력히 추천하는 만화이다.

Posted by 크리스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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