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작은 별 아래서>를 인용하면서, 인터넷에서 찾은 한국어 번역에 한 줄이 빠진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그 때는 '아마 처음 인터넷에 올린 사람이 실수로 한 줄을 빠뜨리고 썼나 보다' 는 생각에 그냥 넘어갔었다. 그러나 중간고사와 예비군 훈련이 끝나고 한 줌의 휴식이 찾아오자, 과거에 묻어 두었던 의심과 함께 잠자고 있던 나의 잉여력이 고개를 들었고, 마침내 도서관에서 <작은 별 아래서>가 실린 시집 <끝과 시작>을 찾아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비교를 위해 영어 번역본을 찾다가, 마침 폴란드어 원문이 함께 실려 있는 영어 번역본 (이 책이다) 이 있길래, 그것도 집어들고 도합 두 권의 책을 대출받았다.


우선 문제의 <작은 별 아래서>를 찾아보니, 인터넷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한 행이 빠져 있었다. 해당 부분을 옮겨 써 보면.

...
18 진실이여, 나를 주의 깊게 주목하지는 마라.
19 위엄이여, 내게 관대한 아량을 베풀어달라.
20 존재의 비밀이여, 네 옷자락에서 빠져나온 실밥을 잡아 뜯은 걸 이해해 달라.
21 모든 사물들이여, 용서하라. 내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없음을.
... (한국어 번역본)

...
18 O Truth, do not pay me too much heed.
19 O Solemnity, be magnanimous unto me.
20 Endure, mystery of existence, that I pluck out the threads of your train.
21 Accuse me not, O Soul, of possessing you but seldom.
22 I apologize to everything that I cannot be everywhere.
... (영어 번역본)

보다시피 영어 번역본의 21행에 해당하는 한 행이 빠져 있다. 해당 부분의 폴란드어 원문은

21 Nie oskarżaj mnie, duszo, że rzadko cię miewam. (땡큐 LEXILOGOS.)

이고, 폴란드어를 모르니 -_- 구글 번역기를 돌려 보자 'Do not accuse me, my soul, that you rarely now and then.' 이란 결과가 나왔고, 이는 앞의 영어 번역과 예전에 인터넷에서 찾은 영어 번역인 '
Soul, don't take offense that I've only got you now and then.' 과 비교해 보면 거의 일치한다. 대충 번역하면 '나를 질타하지 말라, 영혼이여, 내 너를 자주 잃어버리더라도.' 쯤 되려나?

근성을 발휘해 두 번역본을 대조해 가며 읽어 보니, <유토피아>라는 시에도 한 행이 누락되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에서 다른 번역도 찾아 봤는데, 여기에도 한국어 번역본에 누락된 행이 실려 있다.)

...
2 그대의 발은 탄탄한 증거의 토대를 딛고 서 있다.

3 모든 길은 목적지를 향해 뻗어 있다.

4 이곳에는 혼돈에서 영원히 해방된 나뭇가지로 뒤덮인
5 '논리적인 가설의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 (한국어 번역본)

...
2 Here you can stand on the solid ground of proof.

3 Here are no points of interest except the point of arrival.

4 The bushes fairly groan under the weight of answers. (Krzaki aż uginają się od odpowiedzi.)

5 Here grows the tree of Right Conjecture
6 with branches disentangled since all time past.
... (영어 번역본)


그리고 <방랑의 엘레지>에서는 한 연이 빠져 있었다. (인터넷에서 찾은 번역은 여기.)

...
30 더 이상 재생도, 복원도 불가능하다.
31 미세한 섬유질이나 모래알,
32 물방울이 만들어낸 세밀한 풍경일수록 더한 법.

33 작별을 내포한 환영의 인사는
34 단 한번의 눈짓으로 족하다.
... (한국어 번역본)

...
28 Innumerable, infinite,
29 yet individual to the very filament,
30 the grain of sand, the drop of water
31 - landscapes.

32 I won't retain one blade of glass (Nie uchowam ani źdźbła)
33 in sharp contour. (w jego pełnej widzialności.)

34 Greeting and farewell
35 in a single glance.
... (영어 번역본)

그리고 여기서 보다시피,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행 구분을 원문과 다르게 해 놔서 행 수가 맞지 않는 부분도 꽤 있었다. 또한 영어 번역문과 뜻이 좀 안 맞는 구절도 있는데, 이건 내가 폴란드어를 알 턱이 없으니 어느 게 맞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 느낌으로는 영어 번역은 간결하고, 한국어 번역은 윤문을 조금 가한 것 같기도 하다. 번역 스타일의 차이니 어느 쪽이 옳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뭐, 역자가 실수로 빼먹었겠지, 일부러 빠뜨리고 안 번역한 건 아니겠지만 -_- 폴란드어처럼 마이너한 언어로 된 문학은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고 번역이 정확한지 확인하기도 어려우니, 신뢰할 수 있는 번역이 될 수 있도록 꼼꼼히 신경써서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무척 안타깝다. 잘 알려지지 않은 문학을 번역해 소개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일인데...


그리고 번역과는 상관없지만... 주석 부분을 비교하다 발견한 건데, <물>이라는 시에서 이스 Ys 라는 도시가 나온다. 이에 대해 한국어 번역본의 주석에선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도시'라고 했다. 그런데 영어 번역본의 주석을 보니 이스는 에두아르 랄로의 '이스의 왕 Le Roi d'Ys' 이라는 가극으로 잘 알려진, 바닷속에 가라앉은 전설상의 도시라는 설명이 있다 (참고1 참고2). 어쨌든 '가상의 도시'인 건 맞는데, 이왕 주석을 달 거면 이렇게 자세하게 달아 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이게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_-)


그리고 <동굴>이란 시에서 '파스칼'에 주석을 달아서는 '소리의 크기를 가늠하는 단위'라고 써 놨다. 파스칼 Pa 은 압력을 나타내는 단위인데...




어쨌든 시집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은, 공돌이에겐 너무나 난해한(...) 시들이 대부분이지만, <작은 별 아래서>와 <두 번은 없다>라는 시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해설을 보니 <두 번은 없다>는 폴란드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시라고 카더라.

두 번은 없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밎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며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P.S. 그리고 하는 김에(...) 전에 말했던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완역본이 있나 해서 <두 도시 이야기>의 옛 번역본들을 찾아 봤는데 (그래 봤자 두 권밖에 없더라), 1974년에 휘문출판사에서 나온 이가형 선생님의 번역 (세로쓰기로 쓰여 있었다!!) 에는 내가 찾았던 2005년 어문각 번역본에 빠졌던 부분이 번역되어 있었다. 그리고 2005년 어문각 번역본의 역자인 이기석 선생님의 번역이 1995년 계몽사에서도 나왔는데, 이 번역에도 어문각본에 누락된 부분이 일부나마 실려 있었다. 1974년 이가형 선생님 번역이 완역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나중에 시간 나면 다시 확인해 봐야겠다.

Posted by 크리스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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