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라셀라스>를 읽고 불교적 철학이 연상되었다는 감상을 썼는데, 그래서 불교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고 싶어서 리브로 땡처리 행사 때 불교 최초의 경전이라는 <숫타니파타>를 질렀다.

여러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장 '뱀의 비유'는 굉장히 좋았다. 심오하고도 간지나는 비유로 이루어진 시 형식인데 (유명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여기 나온다) 개인적인 느낌으론 이 장에 <숫타니파타>의 전부가 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 장 이후로는 누구나 다 들어 봤을 법한 말들을 주입식으로 반복할 뿐이다(...)


기억에 남은 몇 구절을 옮겨 본다.

무화과 나무 숲에서는 꽃을 찾아도 얻을 수 없듯이, 모든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보지 않는 수행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 버리듯.    5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습니다. 마히 강변에서 처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내 움막 지붕에는 이엉을 덮어 놓았고, 집 안에는 불을 지펴 놓았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은 대답하셨다.
"나는 성내지 않고 마음의 끈질긴 미혹도 벗어 버렸다.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쉬리라. 내 움막에는 아무것도 걸쳐 놓지 않았고, 탐욕의 불은 남김없이 꺼 버렸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18-19


이때 악마 파피만이 말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기뻐할 것도 없으리라."

스승은 대답하셨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는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33-34


바라문은 번뇌를 초월해 있다. 그가 무엇을 보거나 알아서 집착하는 일은 없다. 그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또 욕망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기가 세상의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부질없이 집착하지 않는다.   795


나는 불교 신자가 아니고, 이 책 한 권 읽은 걸로 불교에 대해 가타부타할 수는 없겠지만(...) 내 느낌으로는, 불교의 세계관은 세상을 꿈도 희망도 없는 눈물의 골짜기로 보는 것 같다.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가 행복이라 생각하는 것들은 알고 보면 전부 부질없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없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고통을 줄이는 것뿐이다. 게다가 윤회에 의해 이 세상에 나고 죽음을 반복하며 계속 고통받게 된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 즉 해탈을 통해 윤회의 고리에서 빠져나오는 것뿐이다. 나는 '세계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고,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행복한 사회를 구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낙관론자라서(...) 이런 암울한 세계관에 공감이 되지 않았다. <숫타니파타>에서 말하는, 지나친 욕망을 다스리는 마음가짐이 행복에 이르기 위한 조건 중 하나라고는 생각하지만, 궁극적으로 현실 도피를 추구하는 듯한 주장은 좀 찝찝했다. 역사 이래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썼던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헛수고로 만드는 듯한 느낌도 들고 -_-;;


좋은 말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한 번쯤은 읽어 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처럼 불교 교리에 대한 호기심으로 책을 읽으려는 사람에겐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법정 스님의 말처럼 '불교 초기의 단순하고 소박한 가르침'을 담고 있기 때문에, 불교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을 바라는 사람과는 코드가 맞지 않는 듯. 그래도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책이었다.


Posted by 크리스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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