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ctics is knowing what to do when there is something to do.
Strategy is knowing what to do when there is nothing to do.                                        

전술이란 할 게 있을 때 뭘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전략이란 할 게 없을 때 뭘 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 Tartakower


지난번엔 전술(Tactics)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번에는 전략(Strategy)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전술과 전략은 비슷한 말 같지만 좀 다릅니다. 전술은 뭔가 묘수가 있을 때 찾아내고 둠으로써 가시적이고 직접적인 이익을 취하는 것이라면, 전략은 체스판의 형세(포지션position이라고 합니다)를 살펴 장기적인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잠재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앞에서 본 것들과 같은 전술적인 묘수가 있는 상황에서는 그걸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딱히 묘수가 없는 상황에서는 뭘 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죠. 이렇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뭘 어떻게 둬야 할지 인도해 주는 것을 전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전략적 판단을 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물량(Material)
물량이란 보유한 말들의 양을 말합니다. 전에 나이트와 비숍은 폰 3개, 룩은 폰 5개, 퀸은 폰 9개... 라는 이야기를 했었죠. 이런 식으로 보유한 말들의 가치를 따져 그 가치가 높은 쪽이 '물량이 우세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상대보다 물량에 있어 우세하다면, 말들을 최대한 교환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상대보다 나이트가 하나 많다면, 나머지 퀸, 룩 등을 전부 교환하고 체스판에 내 나이트와 폰만 남도록 만들면 이후 엔드게임에서 폰을 승진시키기 쉬워지겠죠? 상대는 폰과 킹만 갖고 있는데, 나는 여분의 나이트로 내 폰을 보호하고 상대 폰을 방해할 수가 있으니까요. 또한 교환으로써 상대의 말을 전부 없애면 상대가 반격할 수 있는 힘이 없어지고, 따라서 전세를 뒤집기 힘들어지지요. 그러므로 물량이 우세한 측은 최대한 말을 교환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짜고 게임을 진행해야 하고, 물량이 열세인 측은 교환을 피하며 말을 아껴 반격을 노려야 합니다.

2. 부기물(Minor Piece)
부기물이란 나이트와 비숍을 말합니다. 전에 말했듯 나이트는 말들이 서로의 길을 막고 있어 이동이 제한된 상황(이런 걸 닫힌 포지션closed position이라고 합니다)에서 좋고, 비숍은 장애물이 없는 뻥 뚫린 상황(열린 포지션open position이라고 합니다)에서 좋습니다. 그 외에도 비숍이 좋은 조건, 나이트가 좋은 조건은 다양합니다.

- 엔드게임에서 한쪽에 폰이 몰려 있는 경우는 나이트가 좋고, 양쪽에 폰이 분산되어 있는 경우는 비숍이 좋습니다. 비숍은 장거리 능력이 있어 양쪽에 분산된 폰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반면, 나이트는 한 가지 색깔의 칸만 공격할 수 있는 비숍과 달리 모든 칸을 공격할 수 있어서 폰이 한쪽에 몰려 있어 장거리 능력이 필요 없는 경우에 유리합니다.

-일반적으로 비숍 1개 + 나이트 1개보다는 비숍 2개가 더 유리합니다. 비숍이 2개 있으면 한 가지 색깔 칸만 공격할 수 있다는 약점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숍이 2개인 측은 비숍 교환을 피하고, 반대로 상대의 비숍이 2개면 비숍을 교환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이트는 단거리 공격을 하기 때문에, 상대의 진영 깊숙이 파고들수록 강해집니다. 특히 내 폰의 보호를 받으며 상대 폰 안쪽까지 파고들어 짱박히면 상대 입장에서는 난감해지지요. 나이트가 자기 폰 안쪽까지 들어오면 폰으로 공격해 쫓아내는 것이 불가능한 데다가, 나이트의 공격 때문에 자기 진영 내에서 말을 움직일 수 있는 칸이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위 그림에서 백 나이트는 흑 폰들이 공격할 수 없는 지점인 d5에 자리를 깔고 앉았습니다. 반면 흑 비숍은 e5의 흑 폰 때문에 갇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흑은 자신의 나쁜 비숍과 백의 좋은 나이트를 교환하고 싶겠지만, 흑 비숍은 어두운 칸에 있고 백 나이트는 밝은 칸에 있어 교환할 수도 없습니다. 흑은 백 나이트를 쫓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에 b6, c7, e7, f6 등을 공격하는 백 나이트의 방해를 감수하며 게임을 해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조건을 고려하여, 나이트가 좋고 비숍이 나쁜 상황이라면 내 비숍과 상대의 나이트를 교환하는 것이 유리하고, 비숍이 좋고 나이트가 나쁜 상황에선 내 나이트와 상대의 비숍을 교환하는 것이 유리하겠죠. 역으로 상대는 나이트가 있고 내겐 비숍이 있다면, 체스판이 비숍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도록 유도하고, 반대의 경우 나이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뀌도록 하면 좋겠지요. 이런 것을 생각하며 게임을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3. 공간(Space)
한쪽이 차지하고 있는 땅의 넓이를 말합니다. 폰을 성벽으로 생각하고, 폰 뒤쪽의 빈 공간들은 자신의 말들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땅이 됩니다. 공간이 넓은 쪽은 상황에 따라 말들을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어 유리하고, 공간이 좁은 쪽은 말들의 움직임에 제약이 있어서 공격당해도 피하기 어려워져 불리합니다.

위 그림에선 백이 더 넓은 공간을 갖고 있습니다. 흑의 말들, 특히 비숍은 거의 움직일 수가 없다시피하죠. 이렇게 공간이 좁은 측은 공격당해도 제대로 피하지도 못하고 엉켜서 버벅이다 압살당할 수 있기 때문에 불리한 것입니다. 중앙을 점령하는 것도 더 넓은 공간을 확보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도 볼 수 있겠죠. 공간이 좁은 경우 해결책 중 하나는 말을 교환하는 것입니다. 말을 교환하면 그만큼 빈 공간이 생겨나고 움직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공간이 넓은 쪽은 교환을 피해야겠죠.

그리고 공간을 넓힐 경우 조심할 것은, 폰이 전진하면 폰 뒤로 상대의 말이 침입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폰은 한 번 전진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한 지점을 방어하고 있는 폰을 섣불리 전진시키면 앞에서 본 것처럼 나이트가 파고들어온다든지 하는 사태가 터질 수 있으므로 유의해야 합니다.

공간에 관하여 제 게임에서 나온 사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예전에 게임 분석에서도 다뤘던 겁니다.

제가 백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차지한 공간은 백이 더 넓습니다. f5의 백 비숍은 폰의 보호를 받으며 좋은 자리를 잡고 있는 동시에 f6의 흑 폰 전진을 막아 흑이 공간을 넓히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한편 f8의 흑 비숍은 갇혀 있으며, g5의 흑 룩은 백의 h4에 의해 ...Rg7로 후퇴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흑 비숍과 룩은 완전히 갇혀 버리고, 룩과 비숍 떼고 두는 게임이나 다름없게 되죠. 이런 상황에서 흑은 ...Rxf5!를 두어 룩과 비숍을 교환하는 손해를 감수하고 공간을 넓히는 것을 택했습니다. 물량은 손해지만 좋은 위치에 있는 비숍을 없애고 공간을 확보해 숨통을 트는 좋은 수입니다. 게임은 결국 흑이 이겼습니다.

4. 열린 세로줄(Open File)과 지점(Square)의 활용
자신과 상대의 폰이 하나도 없는 세로줄을 '열린 세로줄'이라 합니다. 이 열린 세로줄에 직선 공격을 할 수 있는 룩이나 퀸을 배치하면 그 세로줄 상의 모든 칸을 공격할 수 있으며, 또한 그 세로줄을 통해 상대의 진영 안쪽으로 침입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점이 됩니다. 위키피디아에 좋은 예가 있더군요.

<Anand-Ivanchuk, 2001>
백은 34. e5! dxe5로 폰을 하나 희생하고 d파일을 열었습니다. 이제 d파일에 이중으로 겹쳐진 백 룩들이 서로를 보호하며 상대 진영으로 침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백 룩들은 이렇게 상대 진영 깊숙이 뚫고 들어갑니다. 이후 백은 Rda8 후 흑의 a폰을 따내 백 a폰 승진을 위협하여 이겼습니다.



또한 위 그림에서 백 나이트는 좋은 지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흑 폰이 공격할 수 없는 c4에 자리잡아 a5 폰을 보호하는 동시에, 열린 d파일 중 중요한 d6 지점을 공격하여 흑이 ...Rd6으로 열린 세로줄로 침입해 오려는 백 룩을 막는 수를 두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중요한 지점을 읽어내고 여기에 공격을 가해 상대의 대응을 차단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열린 세로줄이나, 상대 폰 사이에 생긴 빈틈을 이용하면 상대의 진영으로 침투하여 공격하거나 상대의 움직임을 방해할 수 있어 유리해집니다.

5. 폰 구조(Pawn Structure)
폰은 같은 가로줄 상에 늘어서 있거나, 대각선 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게 이상적입니다. 대각선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서로를 보호해 주는 이점이 있고, 가로로 늘어서 있는 경우엔 서로를 보호해 주지는 않지만, 공격받을 경우 폰 하나가 전진하면 보호될 수 있는 등 유동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폰의 배치를 '폰 구조'라고 부르는데, 폰이 말을 잡으며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면 이 폰 구조가 꼬여 버리기도 합니다.



-고립된 폰(Isolated Pawn)
좌우 세로줄에 자기 편 폰이 없어서, 다른 폰에게 보호받을 수 없는 폰을 말합니다(그림의 a7, e5폰). 이런 폰은 보호하기 힘들기 때문에 상대의 좋은 공격 목표가 됩니다. 특히 엔드게임에서는 다른 폰의 보호를 받지 못하므로 전진시키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중 폰(Doubled Pawn)
같은 세로줄에 폰이 두 개 있는 것을 말합니다(그림의 b4, b5 폰). 이런 폰은 서로를 보호해 주지 못하고, 앞의 폰이 뒤 폰의 전진을 방해하기 때문에 약점이 됩니다.
다만 고립된 폰이나 이중 폰이 있다는 것은, 열린 세로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고립된 폰이나 이중 폰이 있어도 인접한 열린 세로줄을 잘 활용한다면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뒤처진 폰(Backward Pawn)
폰이 대각선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보호해 주는 형태를 폰 사슬pawn chain이라고 하는데, 이 폰 사슬 맨 뒤에 위치하여 보호받지 못하는 폰을 말합니다(그림의 c4, c7, g4, g7 폰). 이런 폰은 고립된 폰처럼 보호가 힘들기 때문에 약점이 됩니다. 그래도 뒤처진 폰은 전진함으로써 다른 폰에 보호될 수도 있기 때문에 고립된 폰보다는 낫습니다. 또한 이 폰이 없어지면 폰 사슬이 흔들리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하기도 합니다.

-지나친 폰(Passed Pawn)
자신이 있는 세로줄과 좌우의 세로줄 전방에 상대의 폰이 없는 폰을 말합니다(그림에서 e5폰이 한 칸 전진하면 지나친 폰이 됩니다). 이런 폰은 상대 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전진할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승진할 수 있고, 특히 상대 진영 안쪽까지 전진한 지나친 폰은 큰 이점이 됩니다.

만일 상대에게 고립된 폰, 이중 폰, 뒤처진 폰이 있으면 이들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고, 지나친 폰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라면 지나친 폰을 만들고 이를 전진시켜 승진을 위협하는 것이 좋겠지요.



이렇게 전략에 대한 것들을 간략하게 추려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항들을 바탕으로 체스판의 포지션을 분석, 평가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포지션으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전략입니다. 진짜 체스 고수들과 게임을 해 보면, 도저히 둘 것이 없어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에 성급히 공격을 지르다 농락(...)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수들은 체스판의 상황을 조금씩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끌고 동시에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며 상대가 둘 것이 없도록 만드는 능력을 갖고 있기에, 상대는 자기도 모르는 새 불리한 상황으로 끌려오고 막다른 곳까지 몰리면 성급히 공격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궁극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전술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전략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전술을 쓰려면 상대에게 약점이 있고, 그 약점을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 내게 있어야 하는데, 이런 유리한 상황을 미리 만들어 멍석(...)을 깔아 놓는 것이 바로 전략이기 때문이지요. 전술적 묘수는 결국 전략을 통하여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낸 사람에게 주어지기 마련이므로, 수준 높은 게임을 하려면 전략을 통해 게임을 자기 뜻대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저한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건 아닙니다


전술 차원에서의 우연은 전략 차원에 있어서의 필연이 남긴 잔광의 파편에 불과하다.

                                                                                                        - 양 웬리, <은하영웅전설> 中 (...)



그리고 이걸 마지막으로 체스 강좌를 끝내겠습니다. 제가 아는 건 다 쓴 것 같고(...)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을 원하신다면 더 뛰어난 분들이 계신 다른 사이트들 둘러보며 공부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개인적으로 YAchess를 추천합니다). 당초의 목표는 '초보자들이 맛보기 수준으로 체스를 배우고,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이것저것 찾아보며 스스로 공부할 수 있게 하는 것' 이었는데, 잘 이루어졌을지 모르겠군요. 저는 이만 블로그 본업인 독서 감상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Posted by 크리스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