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오프닝(Opening)에 대해 글을 쓰려 합니다. 하지만 오프닝이란 게 워낙 다양한지라 어디부터 뭘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군요(...) 제 능력도 부족하고, 애초에 이 강좌의 목표가 '초보자들이 수박 겉핥기 수준의 지식을 갖게 하는 것'인 만큼, 이전처럼 개괄적인 설명만을 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오프닝이란 '체스 초반에 말들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다루는 분야입니다. 위키느님(...)에 따르면, 오프닝의 목표는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고 하는군요. 몇 개만 추려 보면...

1. 전개(Development)
전개란 말들을 전진시켜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각각의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말을 배치하고 진형을 꾸미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들이 중앙을 공격하는 동시에 서로를 잘 보호해 주고, 필요할 때 원하는 곳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배치하면 이상적이겠지요. 또한 전개를 하면서 내 진영에 약점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동시에 상대의 진영에 약점이 만들어지도록 유도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2. 중앙 점령
게임 초반에는 상대의 진영 어디에 약점이 생길지, 어느 지점을 목표로 공격해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단 중앙을 점령해 놓으면, 중앙에 있는 말들은 구석에 있는 말들에 비해 더 이동 범위가 넓어지고, 따라서 상대의 진영에 약점이 생겼을 때 그 지점으로 쉽게 집합하여 공격을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중앙을 점령하면 상대는 그만큼 말의 움직임이 제한되기도 하지요.

3. 킹의 안전
킹이 체크메이트당하면 게임이 끝나는 데다, 체크메이트까지 당하지는 않더라도 킹이 공격에 노출되면 상대가 이를 이용하여 공격을 해 올 수 있기에(예를 들어 체크를 치면서 동시에 내 말을 공격한다든가) 킹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따라서 캐슬링을 하여 킹을 접전이 벌어지는 중앙에서 피신시키고, 동시에 룩을 중앙으로 가져와 공격에 가담시키는 것도 중요합니다. 역으로 상대 킹의 방어가 불안하다면 이를 이용해 공격해야겠죠.


말은 쉽지만 -_- 실제로 하기는 어렵죠. 자, 여러분이 백을 잡았고, 첫 수를 두어야 한다고 합시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과연 무슨 수를 두면 좋을까요?

1. e4!!



아주 좋은 수입니다. 킹 앞의 폰을 두 칸 전진시킴으로써 폰을 중앙에 배치하고, 상대의 말이 중앙으로 들어오는 것을 방해합니다. 동시에 킹 옆의 비숍이 전진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나이트는 폰들이 앞을 막고 있어도 뛰어넘을 수 있으니 상관이 없는데, 비숍은 대각선 앞의 폰이 비켜 줘야 움직일 수 있겠죠? 또한 이 비숍이 나가야 킹사이드 캐슬링을 할 수 있으므로 킹의 방어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한다고 할 수 있겠죠. 중앙 점령, 비숍의 전개, 킹의 안전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하는, 천재적인 수입니다(...)




1...e5


흑도 같은 수를 둡니다. 킹 앞의 폰을 두 칸 전진시켜 중앙에 백과 동등한 영향력을 가합니다. 백은 계속적으로 중앙에 진출해 흑보다 우세한 영향을 확보해야 합니다.

2. Nf3!!


좋습니다! 백은 중앙을 향하여 나이트를 전개하는 동시에 흑의 폰을 공격합니다. 흑은 이 폰을 보호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하고, 따라서 흑의 대응수는 제한을 받게 됩니다. 흑은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까요? 만약 ...Qf6이나 ...Qc7로 퀸을 움직여 폰을 보호하면, f6으로 진출해야 할 나이트가 갇히거나 c7로 나가야 할 비숍의 길이 막힙니다. 게다가 나중에 중요하게 쓰일 퀸을 고작 폰 하나 보호하는 데 묶어 두긴 아깝죠. ...Bd6으로 폰을 보호하면? 이러면 퀸 앞의 폰이 갈 길이 막히고, 덩달아 퀸 옆의 비숍도 갇힙니다. ...d6은 어떨까요? 이러면 킹 옆의 비숍의 움직임이 제한됩니다. 게다가 백은 중앙을 향하여 나이트를 진출시켰는데 흑은 폰을 한 칸 움직이고 땡이라니, 뭔가 아쉽습니다. 더 좋은 수는 없을까요?

2...Nc6!!


백이 나이트를 전개하며 흑을 공격했듯이, 흑 역시 나이트를 전개하는 동시에 폰을 보호합니다! 이로써 흑은 전개와 중앙 점령에 있어서 백에 뒤처지지 않게 되었고, 중앙에 대한 영향력은 다시 동등해졌군요.

3. Bc4


백은 비숍을 중앙으로 진출시킴으로써 중앙에 공격을 가하며 캐슬링을 준비하고, 동시에 흑의 f7 폰을 겨냥합니다. 이 f폰은 오직 킹에 의해서만 보호되고 있는, 취약한 지점입니다. 이후 Ng5를 거쳐 Nxf7을 두면 나이트로 흑의 퀸과 룩을 동시에 공격하게 되지요. 물론 흑이 보고만 있지는 않겠지만(...)

3...Bc5


흑도 똑같이 대응합니다. 비숍의 전개와 캐슬링, 백의 약점인 f2폰 공격을 동시에 이뤄냅니다. 어설프게 f7 폰을 보호하기보다 반격으로 맞받아치는 것입니다. 다만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맞공격을 하면 먼저 두는 쪽인 백이 유리하기 때문에 흑으로서는 주의를 기울여야겠죠.

(이상은 Irving Chernev, <Logical Chess>, pp.11-14를 참고했습니다.)


이상의 세 수는 'Giuoco Piano' 라 불리는 오프닝입니다. 오프닝에서 각 수가 전개와 중앙 점령 등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감을 잡으셨을지 모르겠네요. 이외에도 다양한 오프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Ruy Lopez
1.e4 e5 2.Nf3 Nc6 3.Bb5


16세기 체스 연구가의 이름을 딴 오프닝이라 합니다. 만약 흑이 퀸 앞의 폰을 움직이면 흑 나이트는 뒤의 킹 때문에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백은 비숍을 전진시켜 중앙 폰을 보호하는 흑 나이트를 견제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이후 Bxc6 후 Nxe5로 비숍과 나이트를 교환하고서 폰을 따낼 수는 없습니다. 이랬다간 ...Qd4로 백 나이트는 도망쳐야 하고, 그러면 ...Qxe4로 백 폰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이 Bxc6로 비숍과 나이트를 교환하면 흑은 폰으로 비숍을 되잡아야 하고, 그러면 흑의 폰 구조가 흐트러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폰이 옆으로 나란히 있으면 한쪽이 공격받을 경우 한 칸 전진하여 서로 보호할 수 있는데, 폰이 앞뒤로 나란히 있으면 서로를 보호할 수 없기 때문에 약해집니다. 백은 이렇게 상대 진영에 약점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물론 Bxc6 말고 다른 진행 방법도 많습니다.

Queen's Gambit
1.d4 d5 2.c4


백은 첫 수로 e4 대신 d4로, 퀸 앞의 폰을 전진시키기도 합니다. 이 경우 킹 옆 비숍의 전진이 늦어지지만, 대신 d4 폰은 퀸의 보호를 받는다는 장점이 있지요. 그건 그렇고, 백의 두 번째 수는 대체 무슨 짓일까요? 흑더러 폰을 잡으라고 던져주다니, 미친 걸까요? (...)
만약 흑이 2...dxc4로 백 폰을 잡으면, 흑 폰이 중앙에서 벗어나 중앙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백은 방해물이 없으니 편하게 중앙에 진출할 수 있죠. 게다가 c4로 기어들어온 흑 폰은 흑의 보호를 받기 어렵기 때문에 나중에 되잡을 수 있습니다(원한다면 3. Qa4+ 후 Qxc4로 바로 잡을 수도 있습니다). 백은 폰 하나를 내 주는 대신 빠른 중앙 점령을 노리는 것입니다. 오프닝 이름 그대로 도박gambit이지요.




Sicilian Defence
1.e4 c5


백의 1. e4에 대한, 흑의 가장 강한 응수라고 평가되는 것이 바로 이 1...c5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괴상망측한 수 같지만, 흑은 ...c5를 통해 d4 지점을 공격하며 백이 중앙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동시에 ...c5는 진형의 대칭성을 깨고, 백의 뜻대로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체스는 백이 먼저 두기 때문에 백이 게임의 주도권을 쥐게 되고, 흑이 약간 불리합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흑은 비대칭적인 상황을 만들어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지요.

King's Indian Defence
1.d4 Nf6 2.c4 g6 3.Nc3 Bg7



과거에는 '폰으로 중앙을 점령해야 한다'는 이론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9, 20세기에 '중앙의 폰들은 상대의 공격 목표가 될 수 있으며, 폰은 중앙 점령과 전개를 도와주는 수단일 뿐이고, 폰 이외의 말들로 중앙을 원거리에서 통제해야 한다'는 이론이 나타납니다. 이런 이론을 하이퍼모던hypermodern 이론이라고 하는데, 이 오프닝은 하이퍼모던 이론에 잘 들어맞는 오프닝입니다.
백은 1. d4 이후 중앙으로 폰을 진출시키고, 흑은 나이트와 비숍으로 중앙을 공격하려 합니다. 저렇게 비숍을 배치하는 것을 피앙케토(Fianchetto, 이탈리아어라네요)라고 하는데, 저 비숍은 지금 당장은 나이트에 가로막혀 쓸모없어 보이지만, 나중에 나이트가 비키면 a1부터 h8에 이르는 긴 대각선을 통제하게 되어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다만 이 비숍이 사라지면 킹편 방어가 허술해지게 되므로, 백은 이 비숍을 없애려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여드린 것들은 정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오프닝 자체가 다양한 데다가, 각 오프닝에는 상대의 대응과 그 대응에 대한 대응 등이 이어지는 온갖 변화수(Variation)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수많은 오프닝을 다 알고 있어야 하느냐? 취미로 체스를 두는 우리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요. 이런 다양한 오프닝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원칙들이 있는데, 위에서 말한 오프닝의 목표를 염두에 두고 원칙에 입각하여 두면 됩니다. 몇 가지 원칙들을 보면...

*비숍보다 나이트를 먼저 움직여라.
시작 위치에 있는 나이트는 갈 수 있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백의 킹사이드 나이트를 예로 들면 f3과 h3밖에 선택지가 없죠. h3은 구석이므로 사실상 나이트를 전개할 곳은 f3 뿐입니다. 하지만 비숍은 (e폰이 전진했다면) b5, c4, d3, e2 등 갈 수 있는 곳이 많죠. 그래서 비숍은 어느 지점에 배치하는 것이 좋을지 초반에는 알 수 없으므로, 배치할 곳이 확실한 나이트를 먼저 전개하고 이후 상황을 봐서 비숍을 적절한 곳에 전개하는 것이 좋습니다.

*오프닝에서는 한 기물을 두 번 움직이지 말라.
상대는 여러 말을 모조리 꺼냈는데, 나는 한 말만 나와서 깔짝대고 있으면 쪽수가 딸려 싸움이 안 되겠죠? 그러므로 한 말을 여러 번 움직여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각 말들은 한 번의 움직임으로 최적의 장소에 배치하고, 여러 말을 골고루 움직여 서로 협력하는 동시에 수적으로 우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말이 죽게 생겼는데 두 번 움직이지 말랬다고 안 피하고 죽게 내버려두란 소리는 아닙니다(...) 이러한 원칙에 너무 집착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원칙에 얽매이지 말고 체스판의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두세요.

*캐슬링 후 킹 앞의 폰을 움직이지 말라.
킹 앞의 폰(백이 킹사이드 캐슬링을 했을 경우 f2, g2, h2 폰)이 움직이면 킹편의 방어가 약해지게 됩니다.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에 대한 단적인 예로 제 첫번째 게임 분석을 보세요(...) 킹 앞의 폰이 움직이면 상대가 기물을 희생하고 킹편 방어를 깰 기회를 주거나, 킹 가까이 말을 접근시킬 수 있는 빈틈을 만들어 주게 됩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킹 앞의 폰을 움직여야 할 때도 있으니... 역시 너무 원칙에 집착하지는 마세요.

*퀸을 성급히 움직이지 말라.
상대가 폰, 나이트, 비숍을 배치했는데 여기에 퀸을 돌격시키면, 재수없으면 다굴당해 죽거나, 아니면 도로 후퇴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말을 꺼냈다가 후퇴시키는 것은 앞의 '한 기물을 두 번 움직이지 말라'는 원칙과도 충돌하는, 시간 낭비가 됩니다. 퀸을 움직였다 물릴 바에는, 다른 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른 말들을 전진시키고, 어느 정도 안전이 확보된 후 결정적인 순간에 퀸을 꺼내 강력한 한방을 노리는 것이 좋습니다.

*상대방을 공격하면서 전개하라.
앞에서 예를 보여 드렸듯이, 상대방을 공격하면 상대는 공격받은 말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다음 수의 선택이 제한받게 됩니다. 운이 좋으면 상대의 전개를 늦추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죠.

*전개가 끝나기 전에 성급히 공격하지 말라.
전개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공격에 가담할 수 있는 말들이 부족한 데다가, 내 진영이 아직 완전히 구축되지 않아 약점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상대가 역습을 해 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말들을 최대한 전개하여 가능한 한 큰 공격력을 발휘하고, 진영에 약점이 없도록 방어를 철저히 해 상대에게 반격의 기회를 남겨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런 원칙들은 어디까지나 일반론일 뿐입니다. 생각 없이 원칙만 기계적으로 따르지 말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원칙보다는 여러분의 머리를 믿으세요(...) 그러면 지더라도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Posted by 크리스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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