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

체스 2010. 6. 11. 12:06
처음 체스를 접한 건 초등학교 때로, 교실에 있던 체스판으로 반 친구들과 체스를 두었다. 그때는 캐슬링이니 앙 파상이니 하는 규칙도 몰랐고, 처음 말 배치할 때 킹끼리 마주보게 놓는 것도 몰랐고, 첫 수는 장기마냥 항상 룩 앞의 폰을 움직였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흘러 고등학교 1학년 때, 넘쳐흐르는 야자 시간의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몇몇 급우들과 작당하여 하드보드지에 8x8 네모칸을 그리고, 네모나게 잘라 글자 P, N. B. R, Q, K를 써서 체스판을 만들어 놀았다. (이걸 보신 담임 선생님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한마디: "너네 미쳤냐?") 이 때는 체스에서 중앙이 중요하다는 거나, 캐슬링을 하는 게 좋다는 거나, 오프닝이란 게 있다는 정도는 아는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

쉬는 시간, 점심과 저녁 시간, 야자 시간을 활용해 친구들과 피튀기는 접전을 벌이며 체스를 좀 공부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릴 때 샀던 체스책(제목이 <체스첫걸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행마법과 규칙 외에도 기본적인 컴비네이션, 오프닝 같은 것도 약간 다루고 있었다.)을 다시 꺼내서 읽어보고, 인터넷을 뒤지며 오프닝, 포지셔널 플레이, 폰 구조, 엔드게임 등에 관한 수박 겉핥기 수준의 지식을 쌓았다. 동시에 한게임 체스로 사람들과 대전을 하며 배운 걸 써먹어 보려 하였다.

시간이 지나 학년이 오르고, 수능을 치고,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점점 체스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배운 걸 도통 써먹지 못하겠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상황에서 폰을 올려도 될까? 폰 구조가 흐트러지면 안 좋다던데', '이 말을 또 옮겨도 될까? 오프닝에서 한 말을 두 번 움직이는 건 안 좋다던데' 등,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이상한 수를 두고서 져 버리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히 체스가 싫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체스 이론을 좀 더 깊게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ㅅㅂ 학교 공부도 짜증나는데 게임까지 공부해 가면서 해야겠냐' 하는 의문에 빠져 체스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 군대를 다녀온 후 긴 휴학 기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체스에 손을 대게 되었다. 이번에는 '체스를 재미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해 보기로 하였다. 체스가 재미있었던 시절을 회상해 본 결과, 그 때는 오프닝, 포지션 등 이론은 쥐뿔도 모르는 상태에서 오직 컴비네이션, 즉 묘수 찾기 만으로 게임을 진행했던 것 같다. 치열한 대치 속에서 신의 한 수를 찾아 상대를 무너뜨리는 재미 말이다. 그래서 그 시절로 돌아가, 머릿속에 엉켜 있는 잡지식을 비우고 포지션 따위 될 대로 되라지 하는 마음으로 게임을 했더니,



재... 재미있다!

이 일로 깨달은 건, '취미는 모름지기 승패에 집착하지 말고 재미있게 해야 한다는 것'. 옛날에는 나름 고수가 되어 보겠다고 잘 이해도 못한 체스 이론을 꾸역꾸역 머리에 집어넣었는데, 그게 오히려 게임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된 듯. 어차피 내가 체스 초고수를 꿈꾸는 것도 아니고 재미있고 건전한 취미 생활을 위해 하는 거니까, 그냥 재미있게 하면 장땡이겠지. 앞으로 체스 이론 공부는 필 받을 때만 조금씩 해야겠다.


요즘 이용하는 사이트는 체스큐브(http://www.chesscube.com/). 한게임 체스는 무한 체크, 3수 반복 무승부 같은 룰이 반영되지 않았다는 등 전부터 악명이 자자했는데, 이번 기회에 갈아타기로 했다. 처음에는 BabasChess란 프로그램으로 FICS(http://www.freechess.org/)라는 곳에서 좀 하다가, 체스큐브란 사이트를 발견하고 디자인이 예뻐서(...) 다시 갈아탔다. 레이팅도 매겨 주고, 두었던 게임을 복기하거나 PGN 파일로 저장할 수도 있고, 있을 건 다 있는 듯.

Posted by 크리스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