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지금의 도쿄만 보고 평소 걸어 다니는 것의 도처에 있는 역사를 전혀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p.190.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1989년 4월, 한 부랑자 노인이 가게에서 400엔어치 물건을 사고는 소비세 12엔을 더 내라는 가게 여주인을 칼로 찔러 죽이는 사건이 일어난다. 경찰은 노인을 체포해 심문하지만 노인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 묵묵부답이다. 이렇게 되자 경찰은 치매 노인이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 결론짓지만, 주인공인 요시키 다케시 형사는 노인이 과거에 누명을 쓰고 수감된 적이 있으며, 살인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제보를 받고 이것이 단순한 충동 살인이 아니라 판단하여 노인과 피해자의 과거를 추적한다. 그리고 요시키 형사는 1957년 1월 29일 홋카이도 기차 안에서 벌어진 불가사의한 사건이 이들과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는데...



소설은 '나메카와 이쿠오' 라는 부랑자 노인의 과거 행적을 주인공이 뒤쫓는 것으로 진행되며, 이를 통해 근대 일본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잔혹하게 보여 준다. 패전 후 경제 성장 속에서 발전을 위해 힘없고 약한 사람들의 희생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결과만 좋다면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 버린 분위기 속에서 경찰은 '사회 안정과 치안 유지' 라는 명분을 내세워, 잡지 못한 범인 대신 신원 불명의 부랑자에게 누명을 씌워 20여년간 옥살이를 시킨다. 키 작은 부랑자 나메카와는 같이 수감된 우익 깡패에게 구타당하고 간수에게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는 등 온갖 고초를 겪는다.

미야기 교도소에 있으면 쇼와(1926~1989) 그 자체와 마주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 혹은 쇼와라는, 무리하게 급성장한 시대의 일그러짐이랄까, 외상이랄까, 그런 것이 거기에 꾸역꾸역 쑤셔 넣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p.151.


게다가 요시키 형사의 수사를 통해, 노인은 태평양 전쟁 때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이었음이 밝혀진다. 나메카와 이쿠오 노인은 대구 출신의 조선인 '여태영' 이며, 전쟁 말기에 동생과 함께 징용당해 사할린으로 끌려가 처참한 환경 속에서 강제 노동을 하다가 패전 후 소련군에 붙잡히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탈출해 일본 배를 타고 홋카이도로 넘어와 서커스장의 피에로로 일했던 것이다.

요시키 형사는 노인의 과거, 그리고 1957년 1월 홋카이도 기차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모를 밝혀내고 노인이 32년 전에 죽은 동생의 복수를 한 것임을 알아낸다. 요시키는 노인에게 자신의 추리를 전부 이야기한다. 노인이 오랜 세월 동안 무수한 고통을 겪어 온 것을, 그리고 동생의 복수를 위해 그토록 바라던 귀향마저 포기하고 32년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 온 것을.

다만 요시키는 이렇게 생각했다. 대체 누가 심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오래되고 고된 여행 끝의 살인을.
                                                                                                                                              p.502.



이 작품은 국가라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행해지는 온갖 종류의 불합리한 폭력을 여태영 노인의 과거를 통해 고발하고 있다.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 범죄, 쇼와 시대의 급속한 경제 성장을 위한답시고 행해진 국가의 부당한 폭력... 여태영 노인은 이러한 폭력에 희생된 피해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여태영 노인의 과거를 뒤쫓는 주인공에게 여러 인물의 입을 빌어 일본 사회가 저지른 원죄를 거침없이, 그리고 솔직하게 폭로하고 비판한다. 그리고 수많은 피해자들에 대한 연민을 담아, 여태영 노인에게 '하늘을 움직인' 트릭을 만들어준다.

하늘이 당신의 편을 든 거겠지. 여태까지 당신은 지나치게 불행하기만 했으니까.
                                                                                                                                               p.498.



시마다 소지는 '본격 추리소설' 이라 불리는, 추리 그 자체에 중점을 둔 추리소설로 유명하지만 이 작품은 국가와 집단에 의한 폭력을 비판하고 반성을 촉구함으로써, 범죄 사건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비판하는 이른바 '사회파' 추리소설에 가깝다. (작중 경찰이 죄 없는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 희생시킨 실제 사건이 여럿 나열되고, 조선인 강제 징용 과정, 사할린에서 강제 노동을 하던 사람들의 생활상 등이 자세히 묘사되는데, 작가가 작품을 쓰기 위해 무척 열심히 조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본격 추리소설 특유의, 추리를 통해 사건을 풀어가는 소설적 재미도 놓치지 않고 있으며, 게다가 깊은 감동도 느껴졌다. 특히 마지막의, 요시키 형사가 여태영 노인에게 그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부분이 무척 감동적이었다. 한국인 독자로서, 우리는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의 피해자이기도 하며, 또한 한국 역시 경제 성장과 민주화의 과정에서 많은 부당한 폭력이 있었기에, 요시키 형사의 이야기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여태영 노인의 슬픔에 더욱 크게 공감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참고로 이 작품은 '독자에의 도전'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 나처럼 '독자에의 도전'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독자는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 어느새 사건이 풀리는 것에 허탈해질 것이다. 혹시 추리를 해 보고 싶은 분은 '밤벚꽃의 환상' 장에서 사건이 풀리니 '밤벚꽃의 환상' 전까지만 읽고, '기차 노선도에는 두 노선이 멀리 떨어진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거리는 꽤 가깝다'는 정보만 더하면 아마 추리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범인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우연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도 감안하시기를.

...아니 잠깐, 앞에 '내용 누설 있음' 이라고 써 놓고 이런 얘길 해 봤자 의미가 없나? -_-;;


P.S.






Posted by 크리스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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