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을 포함한 여러 단편들이 실린 단편집이다. <무진기행>은 예전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강추'한 소설이었는데... 이제서야 읽었다 -_-;;

읽는 사람마다 감상이 다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작품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고립, 고독, 소외' 라고 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혼란스럽고 잔혹한 세상 속에서 사회 시스템에 복종하고 순응하는 자, 상처받은 자, 시스템을 거부하며 반항하고 벗어나려는 자, 시스템의 말단이나마 차지하려 발버둥치는 자, 그 싸움에서 밀려난 자들의 모습을 그리며, 이런 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고독감과 소외감, 소통의 부재, 고립, 정체성의 혼란 등을 표현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1960년대를 살던 작가가 인식한 사회의 본질이 투영된 것일까? 그 시대를 살아 보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다(...)


들과 바다 - 아름다운 황혼과 설화가 실려 있지 않은 해풍 속에서 사람들은 영원의 토대를 장만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갔다. 그리고 더러는 뿌리를 가지게 됐고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시들어져갔다는 소식이었다.

누이는 도시로 갔었다. 어머니와 내가 누이를 도시로 보냈었다. 그리고 며칠 전 갑자기, 거진 이 년만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누이가 도시에 가 있던 그 이 년 동안 나는 얼마나 지금 우리 앞에서 지상을 포옹하고 있는 이 자연현상들에게 누이의 평안을 빌었던가. 그러나 도시에서는 항상 엉뚱한 일이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어떠한 일들이 누이를 할퀴고 지나갔었을까, 어떠한 일들이 누이를 빨아먹고 갔었을까, 어떠한 일들이 누이를 찢고 갔었을까, 어떠한 일들이 누이에게 저런 침묵을 떠맡기고 갔었을까. 누이는 도시에서의 이야기를 나와 어머니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한마디 하려 들지 않았었다. 우리는 누이가 지니고 왔던 작은 보따리를 헤쳐보았다. 그러나 헌옷 몇 벌과 두어 가지의 화장도구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걸로써는 누이에게 침묵을 만들어준 이 년의 내용을 측량해볼 길이 없었다. 누이의 침묵은 무엇엔가의 항거의 표시였다. 우리를 향한 항거였을까, 도시를 향한 항거였을까. ... 도시를 향한 항거라면 - 아마 틀림없이 이것인 모양이었는데 - 그렇다면 누이의 저 향수와 고독을 발산하는 눈빛, 사람들이 두고 온 것들에게 보내는 마음의 등불 같은 저 눈빛을 우리는 무엇으로써 설명해야 할 것인가?

도시에 갔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여간해선 돌아오지 못하고 마는 이유는 어디 있는 것일까.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누이는 돌아왔다. 그러나 옷에 먼지를 묻혀오듯이 도시가 주었던 상처와 상처의 씨앗을 가지고 돌아왔다. 무수히 조각난 시간과 공간, 무수히 토막난 언어와 몸짓이 누이의 기억을 이루고 있으리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수한 것들, 별들처럼 고립되어 반짝이는 그 기억들이 누이의 가슴에 박혀서 누이의 침묵을 연장시키고 혹은 모든 것을 썩어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냐, 그 파편들은 무엇이냐? 그리하여 나는 동화 속의 인물처럼 말하였던 것이다 - 이번엔 내가 가보지.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中


전체적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시간적으론 하루키가 김승옥보다 10년쯤 뒤이긴 하다). 흔히 '감각적'이라 불리는, 감성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 비슷해서인 것 같다. 그리고 인터넷을 보다 보니 <무진기행>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작품의 소재나 골격은 비슷한 점도 있지만 분위기나 주제는 전혀 다르다는 느낌이다. <설국>은 '인생무상'을 주로 말한다면 <무진기행>은 '과거의 이상을 좇는 잠깐의 일탈, 그리고 차가운 사회로의 귀환'을 보여 주며, <설국>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분위기인 반면 <무진기행>은 끈적끈적 -_- 하고 어둠에 다크한 분위기다. 뭐, 궁극적으로는 두 작품 모두 형태는 다를지언정 '고독'을 표현하려 한다는 것은 같다고도 할 수 있겠다. 스타일은 많이 다르지만...

<무진기행>처럼 어둠에 다크한 작품이 많지만 (특히 맨 앞의 두 작품인 <생명연습>과 <건(乾)>이 그렇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처럼 약간의 희망을 남겨두는 작품도 있고, <차나 한잔>, <들놀이>처럼 해학적인 분위기의 작품도 있다.

개인적으로 작품들 중 <역사(力士)>,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무진기행>은 정말 간지폭풍이다. 김승옥이 과연 본좌급 작가 중 하나임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작가가 주화입마에 빠져 버린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_-

Posted by 크리스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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