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란 누구나 살다 보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나는 이 단순한 진리를 절실히 깨달았다. 예를 들어, '10월 23일'이라는 날짜를 적어야 하는데, 적을 곳 바로 윗줄에 '9월 24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다고 해 보자. 그러면 머릿속에는 '23일'이라는 날짜가 떠다니는데 눈에는 '24일'이라는 날짜가 들어오고,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손은 척수 반사로 '10월 24일'이라는 날짜를 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왜 저런 걸 헷갈리지? 바보 아님? ㅋㅋㅋㅋ'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누구나 저 비슷한 실수를 해 보았을 것이다.

 나는 치아 교정을 받고 있는 중이라, 매달 한 번씩 치과에 간다. 진료가 끝나면 다음 달 며칠에 예약을 잡을 것인지 간호사와 이야기하고, 간호사는 정해진 날짜를 예약장에 적어 준다. 그러면 나는 예약일을 까먹지 않기 위해 한 달 내내 그 날짜를 되뇌일 필요 없이, 예약일에 관한 기억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 버리고 지내다가 치과 갈 때가 됐다 싶을 무렵 예약장을 펴 봄으로써 빼먹지 않고 진료를 받을 수 있다. 며칠 전에도 이와 같은 알고리즘에 의거하여 나는 예약장을 펴 보았고, '10월 24일'이라는 날짜를 확인하였다. 예약장을 지갑에 집어넣고선 그 날이 무슨 요일인가 하여 달력을 보았더니, 24일은 일요일이 아닌가! 아니 세상에, 뭔 놈의 병원이 일요일에도 진료를 한대? 하는 생각이 들어, 혹시 내가 난독증이 있어 예약장에 적힌 날짜를 잘못 본 게 아닐까 하였다. 앞서 말했듯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예약장을 다시 꺼내 보았으나, 예약장을 뚫어져라 쳐다봐도 거기 적힌 날짜가 '10월 24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 바로 위에 적힌, 지난달 예약일이 하필이면 '9월 24일'이었다. 이걸 발견한 나는 직감적으로 '간호사가 지난달 예약일을 보고 헷갈려 잘못 적은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웠다. 그러나,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한참 예약장을 들여다보노라니 나의 기억마저 혼선을 일으켜, '내가 정말 일요일에 예약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는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치과에 전화해서 물어보는 간단한 해결책이 있었지만, 앞서 말한 불안감이 뜻 모를 자신감으로 변해 가면서 '예약일이 10월 24일 일요일이 맞을 것이다' 라는 속 편한 결론으로 나를 이끌고 말았다. 평일에 시간을 낼 수 없을 정도로 바쁜 환자도 생각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시간은 흘러 10월 24일이 되었고,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 상쾌한 가을 날씨 아래 서늘한 바람을 마시면서 한산한 거리를 느릿느릿 걸어가니, 며칠 전 예약일에 대해 고민하던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구름과 낙엽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 새 치과가 있는 건물에 도착했고,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치과가 있는 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 위의 숫자가 점점 커지는 것을 보며, 잠시 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치과 진료를 받을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캄캄한 어둠이었다. 치과는 물론, 그 층 전체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나는 헛된 희망을 품고 치과 문을 흔들었지만, 문은 열리기를 거부하였다.

I faced the door and all my shame
Tearin' off each piece of chain
Until they all were broken

But no matter how I tried
The other side was locked so tight
That door it wouldn't open

Gave it all that I got
And started to knock
Shouted for someone
To open the lock
I just gotta get through the door
And the more that I knocked
The hotter I got
The hotter I got
The harder I'd knock
I just gotta break through the door                 (<카우보이 비밥> 극장판 OST 'Gotta Knock A Little Harder' 中)

 허망한 마음에 휩싸인 채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니, 건물 수위 아저씨가 팔짱을 낀 위압적인 자태로 문 앞에 서 있었다. 흡사 <셜록 홈즈>의 레스트레이드 경감을 연상시키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며, 몇 층에 무슨 일로 올라갔다 온 건지 나를 취조하려 들었다. 치과에 올라갔다 오는 길이라 했더니, 이거 바보 아냐? 하는 듯한 표정과 함께 '일요일인데 치과가 하겠냐' 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되니 나로서는 '그러게 말예요' 라는 얼빠진 대답밖에 할 말이 없었다. 수위 아저씨를 붙잡고선 예약장을 보여 주며 하소연이라도 해서 의심을 풀어 드리고 싶었지만, 나를 도둑놈 보듯 하는 무시무시한 눈빛에 기가 죽고 말았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해 보니, 어쩌면 간호사가 치과와 같은 층에 있는 무언가를 노린 원대한 범죄를 계획하였고, 그 용의자로 나를 지목하기 위한 악마적인 계략을 세워 나를 낚은 것이 아닐까 하는 망상조차 들었다.


 그래서, 이 글의 주제가 뭐냐고? 아마도 '미심쩍은 게 있으면 미루지 말고 바로바로 확인하자' 가 아닐까.

Posted by 크리스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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