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움베르토 에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지구상에서 가장 박학한 생물'이라 불리는(...) 움베르토 에코 할아버지의 칼럼집이다. 사소한 일상의 단면에서 깊은 사색을 통해 생각할 꺼리를 끄집어내고, 유머를 곁들여 풀어내는 글들이다. 여행하며 겪은 일들, 운전 면허증을 도둑맞아 재발급을 받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 축구광들에 관한 이야기, 조금 심각한 내용으론 탈세나 사형 제도에 관한 글도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멍청하고 한심한(...) 일들을 주로 이야기하는데, 이런 일들을 꼬집으면서 주제에 점점 깊이 파고들고, 숨겨진 중요한 의미를 끌어내 독자들로 하여금 생각해 보도록 함으로써 독자들이 세상을 읽는 눈을 키울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느낌의 글들이다.

에코의 광대한 인문학적 지식으로부터 나오는 수준 높은 유머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겠다. 문학, 철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를 인용하며 글을 풀어내면서, 동시에 개그 소재로도 활용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의 지적인 자괴감을 불러일으키고 독서욕에 불타오르게끔 하는(...) 기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글 내용은 어렵지 않지만, 에코가 여기저기서 끌어오는 엄청난 지식의 양을 보노라면 자신의 지식 부족을 한탄하게 된다.

번역자는 베르베르의 <개미> 등을 번역한 이세욱 씨. 에코의 유머러스한 글을 정말 잘 번역하셨다. 문장력과 어휘 구사, 표현력 등등... 번역자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에코의 유머를 이렇게 잘 살리지 못했을 듯.

굳이 한 가지 지적하자면, 후반부에 '어떻게 지내십니까' 라는 질문에 대한 유명인들의 가상의 답변을 모아 놓은 장인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에서 보면, '푸코'가 '누구 말씀이죠?' 라고 대답한다. 여기 달린 주석에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 이 항목은 이런 뜻이 아닌 것 같다. 유명한 인물 중에 푸코가 둘 있는데, 위의 미셸 푸코와, '푸코의 진자' 실험으로 지구의 자전을 증명한 과학자 레옹 푸코이다. 에코는 푸코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둘 있다는 걸 이용해 '누구 말씀이죠?' 란 드립을 친 건데, 역자가 과학자 푸코의 존재를 몰라서 이런 일이 벌어진 듯하다.

에코의 신문 칼럼을 모은 다른 책들도 있는데, 번역자가 바뀌어서 글이 좀 딱딱해진 데다가 이탈리아 사회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서, 이탈리아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한국 독자들로서는 쉽게 읽히지 않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번역자가 본좌급인 데다가(...) 에코의 괴물같은 예능감유머도 많이 나오고 해서 굉장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2.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할아버지의 글 모음집. 여기에도 적절한 유머가 나오긴 하는데, 위의 에코의 글에 비하면 블랙 유머에 가까운 분위기이다. 일상을 주로 다루는 에코에 비하면 내용도 좀 무거운 편.

작품의 표제인 <게으름에 대한 찬양> 장에서 러셀은 '4시간 노동설'을 주장한다. 과학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는 적은 노동으로도 전 인류가 이용하기 충분한 물품을 생산할 수 있으니, 정부가 노동 시스템을 적절히 조직하면 모든 사람이 4시간만 일하면 사회가 굴러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옛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한 설이라는데, 나는 이걸 이 책에서 처음 접하고 '아 ㅅㅂ 인간들이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이 쓰인 시대는 1차 대전 후, 경제 공황으로 물자의 생산은 넘쳐나는데, 사람들은 돈이 없어 빈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시절이다. 이러한 시대상을 러셀은 얼마나 한심하게 바라보았을까. 공장에서 12시간씩 중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노동 시간을 줄이고, 그 자리에 실업자를 투입하면 될 텐데 말이다. 물론 이런 사회를 만드는 데에는 현실적인 장벽이 있겠지만...

러셀이 장을 끝맺으며 한, '(이런 사회가 구현되면) 인생에 행복과 환희가 충만할 것이다. ... 필요한 일만 함으로써 기력을 소모하는 일 없이 여가를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보다 친절해지고, 서로 덜 괴롭힐 것이고, 타인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라는 말이 무척 와 닿았다.

이외에 1차 대전 후 승전국의 전쟁 배상금 문제, 히틀러의 파시즘, 사회주의 체제 등에 대한 글들도 있다. 앞서 말했듯 좀 무거운 주제들이긴 하지만, 러셀이 글을 쉽게 썼기 때문에 재미있고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읽다 보면 인간이 얼마나 멍청한 존재인지 느낄 수 있다(...)

번역에 대해 할 말이 좀 있다. 읽다 보면 '호머'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문맥상 이건 분명 그리스의 대시인 '호메로스'를 가리킨다. 그런데 번역자는 이걸 '호메로스'가 아니라 호메로스의 영어식 표기인 '호머Homer'라고 번역해 놓은 것이다. 한국에선 그리스식 표기대로 '호메로스'라고 부르는 사람을 '호머'라고 써 놓으면, 이게 호메로스라는 걸 알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역자 약력을 보니 S대 영어영문학과 출신인데, 설마 Homer가 호메로스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테고 (나도 이걸 영문학과에서 개설한 단테 교양 강의에서 배웠으니까)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번역했는지 모르겠다. 만약 정말 Homer가 호메로스인 걸 몰랐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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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두 책 모두 강력 추천하는 책이다. 문학의 경우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을 꼽기가 힘들지만, 이런 책은 아무한테나 추천해 줄 수 있는 책(...) 하여튼 이 자리를 빌어 '제발 한 번 읽어 보세요!' 하고 외치고 싶은 책들이다.


P.S. 이번에도 '예전에 읽은 책 다시 읽고 감상 쓰기' 가 됐다. 도통 책이 손에 안 잡히는 걸 보니, 내 머리가 굳은 건지...

Posted by 크리스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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