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이해하지조차 못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바다와의 교신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p.36

인간은 자기 자신이 갇혀 있는 어두운 미로와 비밀의 방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또한 자기 자신이 갇혀 있는 방문 뒤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도 모르는 채 다른 세계를, 다른 문명을 탐사하러 나섰다.
                                                                                                                                              p.230




SF 소설로, 넓은 바다로 이루어진 '솔라리스' 라는 행성에 파견된 연구자들의 체험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솔라리스의 바다' 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다. 이 생명체는 행성의 궤도를 수정할 수도 있고, 인간의 기억을 읽거나 물체를 원자 수준의 정확도로 복제할 수 있는 등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지성과 능력을 갖고 있다. 많은 과학자들이 솔라리스의 행동 원리를 밝혀내려 하였고, 솔라리스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물리, 화학, 생물학
적 현상을 설명하려 하였으나 지금껏 만족스러운 해답을 제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주인공 크리스 켈빈은 심리학자로서 솔라리스 우주 정거장에 파견되지만, 도착해 보니 몇 안 되는 연구원들이 전부 '누군가를 보았다' 며 환각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주인공은 연구원들의 주장을 단순한 망상으로 치부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의 앞에 자살한 연인 레야가 나타난다. 솔라리스는 연구자들의 기억을 더듬어, 그 속에서 소중한 사람을 끄집어내 복제하여 보낸 것이다.

주인공은 자기 옆에 나타난 연인의 모습을 보고 이것이 꿈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너무도 생생한 레야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껴 그녀를 없애 버리려 하기도 한다(우주선에 태워 행성 밖으로 날려 버린다). 그러나 레야는 다시 생성되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나타나고, 주인공은 그녀를 받아들이고 함께 생활한다.

주인공은 레야와 생활하면서 그녀의 존재에 대해 여러 모로 분석을 시도하고, 그녀의 행동과 기억이 진짜 레야와 일치하지는 않으며, 그녀가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거의 유사하나 구성 입자가 중성미자로 이루어져 있고, 큰 상처를 입어도 금세 재생된다는 등을 밝혀낸다. 레야도 주인공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갖고 있는 레야라는 인간의 기억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조금씩 눈치채게 된다. 그러나 주인공은 이 레야가 '가짜' 임을 알면서도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레야는 자신이 '진짜' 가 아님에도 주인공을 사랑해도 되는지 고민한다.


한편 소설은 솔라리스 연구사史와 솔라리스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현상을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솔라리스의 불가해성을 강조한다. 인간은 솔라리스를 발견한 이후로 수많은 조사와 실험을 하고 온갖 이론을 쏟아내었지만, 그 결과로 얻은 결론이란 '우리는 솔라리스를 이해할 수 없다' 는 것과 다름없었다. 마찬가지로 솔라리스가 인간에게 행하는 실험, 즉 '인간의 기억을 들추어내 보여 주는 것' 또한 인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이다. 인간은 솔라리스가 왜 이런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들춰진 아픈 기억에 괴로워할 뿐이다.

인간이 솔라리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과학적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주인공과 동료 스노우 박사의 논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스노우 박사는 레야를 사랑한다는 주인공에게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는 것인지, 솔라리스가 만들어낸 허상에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우리는 사랑이란 감정이 상대방의 외면에서 기인하는지, 내면에서 기인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에게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사고를 당해 외모가 끔찍하게 망가졌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아마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외모는 상관없다' 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바뀐 것이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라면 어떨까? 주인공은 자기 옆의 레야가 과거에 자신이 사랑하던 그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상대방의 외면에서 기인하는 것도, 내면에서 기인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일까? 이에 대해 주인공은 '나는 그녀 자체를 사랑한다' 고 대답했지만, 스노우가 지적했듯, 이 레야가 쭈그렁 노파의 외모를 갖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러한 논쟁 장면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솔라리스는커녕 인간 자신의 감정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솔라리스라는 다른 존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결말부에서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주인공은 자신이 앞으로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임을, 누구도 다시 사랑할 수 없을 것임을 느끼고 허무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거대하고 복잡한 도시에서 자신을 잃어 버린 채 헤매고 다니는 나 자신을 떠올려 보았다. ... 나는 거기에 나 자신을 온전히 바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나는 두 번 다시 그 무엇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나 자신을 온전히 바치지 않으리라.

  (이 부분은 역자가 뽑은 인상깊은 구절이기도 하다.)                                                               pp.281-282






작품은 주인공의 좌절로 끝나고 말지만,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가 아닐까.


책 뒤 역자의 말을 보면, 역자가 원문인 폴란드어가 아닌 영어판으로 중역을 했기 때문에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듯하여 암담했다며 자학(...)을 하는데, 그에 비해 번역은 꽤 괜찮았다는 느낌이 든다. 원문을 읽을 수가 없으니 비교야 불가능하지만서도(...) 영어 번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직역투 문장도 아니고, 역자가 머릿속에 잘 들어오는 문장을 구사했다는 느낌이다. 다만 문제는 '금새', '짚히는', '붉으스름한', '덮혀' 같은 맞춤법 오류가 자주 보인다는 것... 그리고 솔라리스 연구사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리에만' 이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아마도 리만(Riemann)을 잘못 쓴 듯하다. 이 부분에선 가상의 과학자들이 많이 등장해서 괴상한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여기에 작가가 진짜 수학자를 살짝 끼워 넣었더니 역자가 낚인 듯. 인터넷 서점에서 찾아보니 <솔라리스>의 새 번역본도 나왔던데, 이건 번역이 어떨지 모르겠다.


분량이 길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화두를 던져 주는, 밀도 높은 소설이라는 느낌이다. SF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과학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그렇다고 작품이 쉽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P.S. 사실 이 책은 오래 전에, 군대 가기도 전에 읽었던 책인데(...) 요즘 책이 머릿속에 잘 안 들어와서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은 것이다.
Posted by 크리스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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