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경향] 연기, 흙 혹은 먹이

“인간은 죽으면 어차피 연기나 흙, 혹은 먹이죠.” “무슨 의미?” “불에 타서 연기가 되거나, 매장되어 흙이 되거나, 자칫하면 동물에게 먹혀버리는 겁니다.”

전에 신문 1면의 책 소개 기사에 이게 올라왔길래, '신문에 소개될 정도면 아무리 못해도 기본은 하겠지' 하는 생각에 읽게 되었다.

(내용 누설이 살짝 있습니다.)


주인공 나츠카와 시로는 미국에서 근무하는 외과의사로, 어머니가 연쇄 주부 구타 생매장 사건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급보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시로는 로그 와선을 맨손으로 정확히 그리는 능력을 발휘해 경찰이 찾지 못한 각 희생자들의 연관성을 밝혀내고, 스스로 범인을 잡아 어머니의 복수를 하기 위해 지연으로 똘똘 뭉친 인맥을 동원하여 독자적인 수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시로의 회상을 통해 자살한 할아버지, 사라진 둘째 형 등 나츠카와 가문의 비밀이 드러나는데...

주인공 나츠카와 집안은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처절한 폭력의 세계의 축소판이다. 집안 남자들에게 대대로 이어지는 큰 키와 지능적이고도 폭력적인 성격,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로,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폭력, '연기, 흙 혹은 먹이'로 상징되는, 언젠가 다다를 이러한 폭력의 귀결, 삶의 무의미함. 주인공은 이런 환경에서 자라나며 자신에 잠재된 폭력의 핏줄에 순응하여 비정하고 치열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주인공은 어머니에게 해를 끼친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자신이 거부해 왔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자각하고, 최후에는 폭력 속에 가려져 있던 아버지의 진심 어린 부정父情을 확인하고, 의사로서의 능력을 발휘해 폭력의 구렁텅이에서 아버지를 구한다. 그리고 더 이상 '연기, 흙 혹은 먹이' 따위가 아니게 된다. 아버지를 구함으로써 그는 아버지의 결함을 받아들이고 용서했고, 또한 아버지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구원한 것이다. 그리고 폭력의 심연 같던 삶에도 살아가는 의미가 있음을, 아직은 그것이 무엇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살아갈 의미가 존재함을 느낌으로써 그는 '연기, 흙 혹은 먹이'로 끝날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사건 묘사가 많아서, 이런 것에 내성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페이지가 지루하지 않게 잘 넘어간다. 그리고 속도감 있는 사건 진행과 더불어 적절한 영어 어구(...)의 구사로 글이 빠르게 술술 읽히는 느낌이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F**k의 사용률이 현저히 증가한다.




주인공이 인상깊게 읽은 작품으로 단테의 <신곡>을 언급하고, 천국편의 구절을 인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건의 중요한 단서로 로그 와선이 등장하는 게, 어쩌면 지옥편에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구덩이 형태의 지옥을 나선형으로 돌면서 내려가는 걸 오마주한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지옥 중심부에 사탄이 있는 것처럼, 범인이 범행을 하기 전에 나선 중심부의 관에서 24시간을 지낸다는 것도 그렇고... 내가 읽어내지 못한 오마주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작가가 <신곡> 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번역... 작중 단테의 신곡 '천당 편'이 나오는데, 한국에서 거의 100% '천국편'으로 통용되는 걸 '천당 편'으로 번역해야 했을까? 원문을 찾아보진 못했지만, 일본에서도 '천국편'이라 부르는 듯한데... 게다가 여러 작가의 이름이 나열되는 대목에서 '쵸사'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초서(Chaucer)'를 말하는 거겠지? 일본 위키에서 검색만 한 번 하면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있는데, 한국에서 통용되는 표기 대신 가타카나 발음 그대로 써 버렸다. 결정적으로, '피오르드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에 이르면 할 말이 없다(...) 번역자가 기본 상식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 그리고 문장 중 '짜증나는 상대를 때려주고 싶어 하는 여자와 하룻밤을 잔다'는 게 있다. '싶어 하는'은 'ほしい'를 번역한 것 같은데, 한국어에서 '싶다'는 일본어의 'ほしい'처럼 단독으로 쓰이는 경우가 없고 앞의 동사를 꾸며 주는 말인데 위와 같이 써 버리면 '여자가 짜증나는 상대를 때려 주고 싶어한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건 내 착각인가? '하고 싶어하는', '원하는' 등으로 번역했어야 할 문장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퉁퉁 부운', '체크 했다' 같은 사소한 맞춤법과 띄어쓰기 오류는 얼마 없지만, 앞의 큰 것들 때문에 괜히 지적하고 싶어진다 -_-



그리고 작중에 의학 용어가 자주 나와서 주석도 꽤 달렸는데, 가끔 '이지메', '트라우마' 처럼 누구나 알 만한 단어에 달아 놓은 경우가 있다. 그런데 오히려 독자들이 잘 모를 <도라에몽> 등장인물들의 일본어 이름이 나열되는 부분이나, <도라에몽> 작가 후지코 후지오 같은 부분에는 주석이 없어서, 이런 데에 주석을 달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도라에몽> 주제가나 요코미조 세이시 같은 작가에는 주석을 달았으면서, 우리 찡구, 이슬이, 비실이, 퉁퉁이랑 후지코 후지오 할아버지는 무시하나염? (...)


소설로서의 재미도 있고, 주제도 간단명료하게 드러나 쉽게 읽히는 작품이다. 위 신문 기사에 나왔듯 '어렵게 쓰는 것보다 쉽게 쓰는 것이 더 어렵다'는 면에서, 쉽게 읽히면서도 주제를 잘 전달해 주는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추리 소설로서 읽기에는... 증거 수집도 빈약하고 감정적인 때려 맞추기(...) 식 추리인지라 치밀한 추리를 바라는 사람은 이 점을 감안해야 할 듯. (특히 밀실인 줄 알았던 창고가 사실 지붕이 돌아간다든가...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

Posted by 크리스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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