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과학을 숭배하는 진성 공돌이였던 내가, 떨어지는 언어 점수를 올리기 위해 문학을 좀 읽어 보자는 생각에 읽은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였다. 하루키 특유의 초현실적인 사건 전개(마술적 리얼리즘?), 인물들의 뭔가 있어 보이는 대화 등을 이해해 보려고 골머리를 썩혔지만 이 대목에서 이 인간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갑자기 이런 사람/사물이 왜 튀어나오는지, 이런 걸 통해 작가가 뭘 말하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는데, 뒤의 역자 해설에서 '하루키가 원래 소설에 다의적인 의미를 담으려 하는 작가'라는 말을 읽고 '아, 내가 바보인 건 아닌가 보다' 하고 안심했다. 이렇게 나름 머리를 굴려 본 게 도움이 된 건지 모의고사 언어 점수가 올랐고, 또한 소설 읽기에도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게임 취향도 이때를 기점으로 바뀌어서, 전략시뮬과 FPS만이 게임이라고 생각하던 내가 스토리 좋은 RPG를 찾기 시작했다.)

폴 오스터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비슷한 스타일의 작가라는 얘길 듣고, <뉴욕 3부작>을 한번 읽어 보기로 했다. 제목 그대로 뉴욕을 배경으로 한 단편 3편으로 구성된 연작 소설인데, 앞의 두 편인 <유리의 도시>와 <유령들>은 서로 관련이 없는 듯하지만, 마지막 편 <잠겨 있는 방>에서 앞 두 편과의 연결 고리가 드러난다 - 하지만 이것도 논리적인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앞 작품들에서 이름만 따온 듯한 느낌이다. 단순히 보면 각각 별개의 작품 같지만, 세 작품 모두 '누군가의 삶을 뒤쫓다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린 사람'을 그리고 있다.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등장하는 논의는 '언어를 통한 소통의 한계', '자신과 타인의 삶을 구분짓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생각한다. 전자는 <유리의 도시>의 바벨탑 이야기, <잠겨 있는 방>에서 주인공과 팬쇼가 잠긴 문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대화 등에서 잘 표현된다. 후자는 <유리의 도시>에서 사설 탐정 행세를 하다 과거의 자신도 현재의 자신도 잊어버리는 작가, <유령들>에서 자신이 감시하는 대상과 동화되는 탐정, <잠겨 있는 방>에서 친구의 행적을 뒤쫓다 혼란에 빠지는 주인공 등, 각 작품의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가 아닌가 싶다. 언어의 한계를 논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 소통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며, 세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상대를 관찰하는 것은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상대의 이미지를 관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주며 결국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안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사람이 아니라 '우리 머릿속에 들어 있는' 그 사람에 대해 안다는 것, 즉 실제의 그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려는 것 같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실제로 알기 위해서는, 그의 이미지에 주관을 투영하는 방해물인 자기 자신을 지워야 하지만, 주인공들은 이 때문에 파멸을 맞는다.

...라고 감상을 썼지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무척 많이 남은 작품이다. 하루키와 비교해 보면, 상당히 허무주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는 점은 비슷하지만 하루키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철학적인 논의를 전개하기보다는 비유적인 수단, 즉 초현실적인 소재를 갑툭튀등장시키거나 등장인물끼리 선문답을 시키거나 하는 등의 방식을 사용하여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한 이해를 요구한다면, 오스터는 주인공의 철학적인 내면 독백, 본 내용과는 무관한 듯 보이는 사변적인 논의를 통한 이성적인 접근을 요구한다. 하루키의 비유적인 표현은 작품의 본 의미를 놓치더라도 독자가 상상력을 발휘하여 독자 나름의 또 다른 의미를 찾아내는, 창조적인 오독의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오스터의 철학적, 이성적인 논의는 이러한 독자의 자유로운 상상을 차단하고 작품 내의 논의에 집중하도록 하기 때문에 더 어렵게 느껴지는 듯하다.
Posted by 크리스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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