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것들 중에서 기억나는 것들을 추려 보았다. 읽긴 읽었는데 깊이 소화하지는 못해서 그냥 짤막한 감상이나 남기려는 책들이다(...)


1. 문학(순수소설)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신병 때, 부대는 광우병 촛불시위 때문에 출동 나가고 우리는 배치받은 지 얼마 안 돼서 부대에 남았는데, 이 때 고참들이 할 거 없으면 책이라도 읽으라고 해서 읽게 된 책. 주인공 요조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 흉내를 내며 살아 왔다며 '부끄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오히려 그가 너무 순수했기에 타락한 인간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스탕달, <적과 흑>

주인공은 미소년에 머리 좋고 능력 있는 간지남. 이 책의 교훈은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차버리면 벌 받는다' 아닐까(...)

나쓰메 소세키, <그 후>, <문>, <마음>

불륜 시리즈(...) 해설을 보면 불륜을 주 소재로 쓴 것이 자연, 즉 자신의 감성에 순응하는 삶을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하여간 소세키는 비교적 옛날 사람인데도 글을 참 세련되게 썼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후>와 <마음>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과거의 행동에 대한 후회를 가슴에 안고 사는 주인공의 모습이랄까.

톨스토이, <부활>

나는 '죄를 지은 사람이 참회하고 구원받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신곡>이나 <두 도시 이야기> 같은 것들도 그렇고. 그런데 이 작품은 새드 엔딩으로 끝나서 뒷맛이 찝찝했다(...) 난 해피 엔딩이 좋은데.

투르게네프, <귀족의 보금자리>
서정적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전역하고 읽은 <예브게니 오네긴>도 귀족과 시골 처녀의 사랑이라는 소재는 비슷한데 분위기나 중심 주제가 몇 광년 떨어져 있어서(...) 대조되었다. 근대 러시아라는 배경이 근대화, 혁명, 농촌의 목가적 생활 같은 것이 섞여 있어서 독특한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움베르토 에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푸코의 추>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에코와 동시대를 겪었던 사람이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듯. 자기 어린 시절 본 만화나 모험 소설 같은 걸 막 써대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푸코의 추>는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었다는데, 나는 영 어려웠다. 내 머리가 나쁜 건가?

헤르만 헤세, <황야의 이리>

한 마리 외로운 늑대와도 같은 간지 아웃사이더 주인공이 방황하는 작품. 해설을 보니 이 작품은 히피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는데, 후반부의 광란 파티(...)를 보면 느낄 수 있다.

김만중, <구운몽>

본격 조선 하렘 판타지 소설. 인간으로 변신한 용왕 딸마저 덮치는, 종족을 초월한 하렘(...) 인생의 승리자인 주인공이 염장을 지르는 작품.




찰스 디킨스, <크리스마스 캐럴>

나쁜 구두쇠 아저씨가 개과천선하고 복 받는다는 훈훈한 이야기. 워낙 잘 알려져 있으니까...

나사니엘 호손, <나사니엘 호손 단편선>

작품 뒤의 해설에 나와 있는, 호손이 미학을 '달빛'에 비유한 것이 기억에 남았다. 밤의 어둠 속의 사물을 은은히 비추어 숨겨진 아름다움을 이끌어 낸다는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단편 내용들도 다크한 공포물 분위기(...)


2. 문학(장르소설)

랜달 개릿, <마술사가 너무 많다>
마법과 과학이 공존하는, 꿈과 희망이 넘치는 세계(...)를 배경으로 한 추리물. 독특한 배경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마법이라고 막 파이어볼 쾅쾅 날리는 게 아니라, 마법을 법의학 대용으로 써먹는다든지 보안 장치를 만든다든지 하는 발상이 독특했다.

시마다 소지, <점성술 살인사건>

부대휴무 날 내가 당번이라 다른 사람들은 외출 나가고 나 혼자 행정반을 지키며 읽은 책. 나는 책을 빨리 읽는 편이 아니고 며칠 동안 조금씩 끊어 읽는데, 이 책은 하루 만에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읽었다. 순수하게 살인 사건의 트릭을 푸는 내용만으로 재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전역 후 같은 작가의 <이방의 기사>도 읽었는데, 이것도 좋았다. <점성술 살인사건>보다는 조금 낭만적인 분위기?

베르나르 베르베르, <파피용>
<개미>는 고등학교 때 재미있게 읽었는데, <뇌>부터 좀 별로다 싶더니 <나무>에서 거하게 지뢰를 밟아서(...) 그 이후 베르베르는 안 읽었는데, 부대에 책이 있길래 읽게 되었다. 이 작가는 '기발한 상상력' 하나로 쇼부를 보는 스타일 같은데, <개미>와 <뇌>를 거쳐 <나무>에서는 전부 어디선가 한 번쯤 본 것 같은 소재로 얘길 쓰고, 그에 연관된 사유도 다들 생각해 봤을 법한 피상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다 재미도 잃어버렸으니 책 만드는 나무가 아까울 지경(...) 고등학교 때 친구가 베르베르를 '생각 존나 많은 척 하는 새퀴'라 평했는데, 듣고 정말 공감됐다(...) 그래도 <파피용>은 마지막 반전 하나는 재미있었다.


3. 문학(기타)

크로포트킨, <크로포트킨 자서전>
아나키즘에 관심이 있어 읽은 책. 이 구절이 기억에 남았다.

'사람은 죽은 후에도 세상에 남고 싶어한다. 하지만 참으로 선량한 사람은 영원히 기억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기억은 다음 세대에 남겨지고 자손 대대로 전해진다. 그렇다면 영원히 산다는 것도 노력해 볼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책이 '세계 5대 자서전' 중 하나라길래 심심해서 진짜인가 검색을 해 봤는데... 한국 검색 사이트에서 세계 5대 자서전을 검색하면 주루룩 나오는데 구글에서 영어로 검색하려니 검색어를 이것저것 넣어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augustine rousseau goethe andersen kropotkin으로도 검색했는데, 이 다섯 명의 이름이 동시에 나오는 문서 중에서 세계 5대 자서전 얘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못 찾는 건가, 아니면 설마 한국 출판사에서 구라를 깐 건가(...)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나는 서양 근대사, 특히 여러 사상의 대립이나 이상 사회를 위한 혁명 등에 관심이 많은데, 이 책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본 좌우익의 대립과 좌익 세력의 분열 등을 서술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 교훈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리고 사람이 목에 관통상을 입고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것 아닌가(...)

카잔차키스, <일본, 중국 기행>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을 때 카잔차키스의 반(反)지성적 사상에 좀 거부감을 느꼈는데, 이 책도 그런 색채가 강하다. 글 전체에 흐르는 반이성적 태도와 동양 사상에 대한 어설픈 찬미, 니체 빨기(...) 등이 좀 부담스러웠다. 내가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 中 니체 까는 글을 읽고 니체에 선입견을 가져서 그런가? 그래서 그런지 군대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 좀 읽어 보려고 했는데, 계속 러셀의 '니체를 파시즘의 원조로 보는 관점'이 떠올라서 좀 읽다가 어려워서못 읽겠어서 포기했다.




4. 인문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
읽으면서 유토피아가 아니라 <1984>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옛날 관점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개인의 자유나 프라이버시 같은 것들을 개무시한 사회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유토피아가 뭔지 고민하게 해 주는 작품(...) 그래도 일종의 공산주의적 사회라든가, 이런 사회상이 이미 한참 옛날부터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읽어 볼 만하지 않나 싶다.

버트런드 러셀, <서양의 지혜/철학이란 무엇인가/행복의 정복>
러셀 3종 선물 세트(...) 앞의 둘은 철학 개론서이긴 한데, 광대한 영역을 다루려다 보니 설명이 간략한 건지 내 머리가 나쁜 건지 잘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가치를 '행복'에 두는 러셀의 사상이 무척 공감되었다. 자유나 정의나 결국은 '행복'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행복'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자유니 정의니 하는 것들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만, 수단에 집착하여 목적을 잊어버리는 것을 경계해야 할 듯. 나중에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읽어 볼 생각이다.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
대학에서 <자유론>을 읽고서 밀에 관심이 생겨서 밀의 다른 책을 읽으려고 본 책. 그런데 읽은 때가 전역 며칠 전이라 마음이 딴 데 가 있었기 때문에(...) 대충 훑어본 책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공감되었는데, 이걸 현실에 적용하려면 문제가 좀 생길 것 같다. 결과만 좋으면 장땡이라든가, 大를 위해 小를 희생시키는 게 정당화된다든가. 그래서 밀도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행복'이라는 걸 좀 엄밀히 정의하려 한 듯.


5. 지뢰



오쿠다 히데오, <공중그네>

내가 책 좋아하는 걸 알고 선임이 빌려준 책. 재미있으려고 쓴 소설 같은데 이건 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빌려준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재미있었다'라고 하긴 했지만(...)

이사카 코타로, <사신 치바>
재미있을 법한 소재를 갖고 쓴 책인데, 결과물이 영 뻔하고 밋밋했다. 책 소개만 보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봤다가 낚인 책(...)

이외수, <하악하악>
이것도 다른 선임이 빌려준 책. 크기도 크고 값도 비싼데 내용은 쥐뿔도 없는 책. 여기 쓰인 거 전부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법한 말들 아닌가? 이것도 빌려준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 '짧지만 깊다'고 하긴 했는데 깊기는 개뿔(...) 존재 자체가 허세인 책. 이걸 읽고 이외수가 싫어졌다(...)


P.S. 전역한 지 몇 달인데 아직도 군대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나(...)

Posted by 크리스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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