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난번에 '속였구나! <서양철학사>!!'
라는 글을 쓴 이후, 을유문화사 판 <서양철학사>를 읽으면서 원문과 대조하며 오역을 찾아 보았다. 번역본 전문을 원문과 하나하나 대조한 건 아니고, 읽다가 뭔가 모순되거나 미심쩍은 부분이 나오면 체크해 뒀다가 그 부분만 원문과 대조하는 식으로 찾았다. (따라서 내가 찾아내지 못한 오역이 더 있을 가능성도 있.)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 치고는 많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역은 오역이니까, 찾아낸 게 아까워서라도(...) 써야겠다. 내가 대략 1개월간 쏟아부은 근성과 잉여력의 산물이니... 그리고 나는 철학 전공자도 영어 전공자도 아니니, 틀린 점 있으면 부디 지적을. (아, 참고로 내가 읽은 건 초판 4쇄이고, 원문은 여기에서 다운받은 PDF 파일을 참조했다.)

그리고 번역본에서 미심쩍은 부분을 원문과 대조해 보면서 느낀 건데, 번역본만 보면 이해가 잘 안 되지만 원문을 참고하면 이해가 되는 곳도 여럿 있었다. 단어들의 의미나 호응 관계, 논리적 흐름을 모호하게 처리해 얼버무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원문과 대조하다 보니, 번역본에서 원문과 다르게 문단 구분을 해 놓은 곳도 많았다.

아무래도 한 사람이 번역한 게 아니라
, 여러 사람이 공역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심증이 몇 있는데, 책 첫머리의 역자 소개에 역자의 역서를 나열하는 부분을 보면 '<서양 철학사>(공역)' 이란 말이 있다 (!! 사실 이것만 해도 결정적인 것 아닌가?). (수정 - 우연히 찾은 건데, 여기의 <서양철학사>는 이 책을 말하는 듯하다. 링크1 링크2 공역자가 하도 많아서 역자 이름을 안 쓴 바람에 서점, 도서관 사이트에서 검색해도 못 찾은 것 같다. 쪽팔려... -_-;;) 그리고 역자가 칸트에 대한 논문을 썼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칸트, 헤겔 등을 다루는 후반부에는 심각한 오역이 눈에 띄지 않았다 (물론 내가 못 찾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고유 명사에 주석을 단 부분에서, 여러 곳에서 언급되는 고유 명사들이 있는데 처음 언급될 때는 주석을 안 달다가 나중에 다시 언급될 때 주석을 단다든가... 예를 들어 기벨린Ghibelline이란 단어가 p.581, p.933에 나오는데, 581페이지에선 주석을 안 달았는데 933페이지에서 뒤늦게 주석을 달았다. 또 시인 셸리Shelley가 p.123, p.317, p.817 등에 나오는데 주석은 946페이지에서 달았다.

좋은 철학 입문서를 찾다가 러셀의 <서양철학사>가 새로 출판되어, 표지도 간지나고 '원전에 근거한 충실한 번역은 물론, 친절한 역주까지 덧붙여 5년여간 정성들여 다듬었다' 길래 질렀더니 이런 시망... 러셀의
<서양철학사>를 읽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차라리 원서로 읽기를 권하고 싶다. 정말로... 게다가 원서 값이 번역본보다도 싸다!


이제 내가 찾은 오역들을 나열하겠다.




'암흑기'라는 말로 600년부터 100년에 이른 시기를 가리키는 관행은 서유럽에 집중하는 부당한 처사에서 비롯된다. 중국의 경우 이 시기는 당 왕조 시대로, 중국 시문학이 꽃을 피운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시기이다. 인도에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이슬람교 문명이 번성했다. 이 시기 그리스도교 세계는 문명을 잃어버리기는커녕 그와 정반대였다. 아무도 서유럽이 후대에 권력과 문화를 장악하게 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p.525

'암흑기'란 단어가 서유럽 중심의 시각에서 비롯되었음을 주장하며, 이 때 서유럽 문명은 보잘것없었지만 다른 지역의 문명은 번성한 시기임을 예를 들며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모순되게 '이 시기 그리스도교 세계는 문명을 잃어버리기는커녕 그와 정반대였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암흑기'인데 그리스도교 세계 문명이 퇴보하지 않고 발전했다는 건가? 원문은 다음과 같다.

Our use of the phrase "the Dark Ages" to cover the period from 600 to 1000 marks our undue concentration on Western Europe. In China, this period includes the time of the Tang dynasty, the greatest age of Chinese poetry, and in many other ways a most remarkable epoch. From India to Spain, the brilliant civilization of Islam flourished. What was lost to Christendom at this time was not lost to civilization, but quite the contrary. No one could have guessed that Western Europe would later become dominant, both in power and in culture.

즉, '이 시기 그리스도교 세계에 있어서의 손실은
(유럽 외 다른 지역을 포괄한) 문명 전체의 손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라고 하는 것이 맞고, 앞의 내용과도 일관성이 유지된다.


성교는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모두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혼 상태가 금욕 생활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면 요비니아누스의 이단에 빠지고 만다. p.600

앞 문장과 뒷 문장이 뭔가 논리적으로 이어져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따로 노는 느낌이다. 원문은 이렇다.

Not all carnal inteicourse is sinful, since it is natural; but to think the married state as good as continence is to fall into the heresy of Jovinian.

원문의 접속사 'but'을 빼먹었기 때문에 문장 간의 연결이 어색해진 것이다. 나라면 이렇게 번역할 거다. '성교는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모두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결혼 상태가 금욕 생활만큼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요비니아누스의 이단에 빠지는 것이다.' 지난번에 다룬 것도 있지만, 이렇게 접속사를 빼먹고 번역해서 논리적 흐름이 뜬금없이 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꽤 나타난다.


같은 종에 속한 개체가 둘 있다면, 두 개체는 적어도 본질이 다른 것인가, 아니면 두 개체 안의 본질이 꼭 같을 수 있는가? p.610

'개별화의 원리'라는 논점을 다루는 부분인데, 저기서 '적어도'란 말이 왜 들어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원문을 찾아보았다.

The question now arises: given two individual things belonging to the same species, do they always differ in essence, or is it possible for the essence to be exactly the same in both?

그러니까
always를 '항상'이 아니라 '적어도'라고 번역한 것이다. 혹시 always에 '적어도'란 뜻도 있나 해서 사전을 찾아 보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어쩌면 '적어도'란 단어를 선택한 데에 깊은 철학적 함의가 담겨 있는데 내가 그걸 이해하지 못한 걸지도 -_-


그러나 기술은 사회에 힘을 제공하지 개인에게 힘을 제공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에 속하는 개인이 난파를 당해 불모의 섬에 닿게 되었다고 하자. 그가 17세기에 살았더라면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낼 테지만, 과학 기술은 한 방향으로 조직된 다수의 개인이 협동하는 과정을 요구한다. p.641

이 부분을 읽고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17세기 사람이 현대인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거지?' 와 '난파 비유와 '과학 기술은...' 하는 문장이 어떻게 '~지만'으로 연결되는 거지? 두 문장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데?' 였다.

But the power conferred by technique is social, not individual; an average individual wrecked on a desert island could have achieved more in the seventeenth century than he could now. Scientific technique requires the co-operation of a large number of individuals organized under a single direction.

could have +
과거분사는 '~했을 수도 있다'는 식의 '가능성'을 나타내는 말이니, 저 부분은 '17세기에 난파당한 사람이라도 현대에 난파당한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낼 수도 있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두 문장은 애초에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역자가 자기 임의대로 두 문장을 접속사 '~지만'으로 붙여 버린 것이다.


탁월한 기량과 덕을 갖춘 돗이 보이게 하는 방법은 바로 탁월한 기량과 덕을 갖추는 방법이라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마키아벨리의 이러한 권력이론이... p.662

... and that one way of seeming virtuous is to be virtuous. For this reason, it may sometimes happen that victory goes to the side which has the most of what the general public considers to be virtue. We must concede to Machiavelli ...

이건 우연히 찾아낸 건데... 번역문의 두 문장 사이에 '이 때문에, 때로는 일반 대중이 생각하는 덕을 더 많이 갖춘 쪽이 승리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라는 문장이 있었는데 그걸 잘라먹었다.


데카르트에서 칸트에 이르는 대륙 철학은 인간이 획득한 지식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어느 정도 수학적 방법에 의존하는데, 수학적 지식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획득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대륙 철학은 플라톤주의와 마찬가지로 순수 사유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경향으로 흘러갔다. p.705

아니,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데 순수 사유의 역할도 최소화한다고? 그럼 철학은 뭘로 해?

From Descartes to Kant, Continental philosophy derived much of its conception of the nature of human knowledge from mathematics, but it regarded mathematics as known independently of experience. It was thus led, like Platonism, to minimize the part played by perception, and over-emphasize the part played by pure thought.

원문은 '감각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 순수 사유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으로 흘러갔다'인데 정반대로 번역해 놨다.


아무도 신을 미워해서는 안 되며,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신이 자신에게 사랑을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애써 바라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스피노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숭배했던 괴테는 스피노자의 명제를 자기희생의 사례로 생각했다. 앞의 명제는 그런 종류에 속하지 않고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에서 논리적으로 귀결된 주장이다. 그는 인간이 신의 사랑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신의 사랑을 바라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증명으로 분명해진다. "그 까닭은,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면, 그는 자신이 사랑한 신이 아니어야 한다고 바라는 셈일 테고, 따라서 신이 고통을 느끼기를 바라는 셈 텐데, 그것은 불합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p.741

'바라지 말아야 한다'와 '바라서는 안 된다'는 같은 말 아닌가?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자신이 사랑한 신이 아니어야 한다고 바라는 셈일 테고,' 라는 문장에서, 신이 뭐가 아니라는 거야? '자신≠사랑한 신'이란 건가? 원문은 이렇다.

We are told that no one can hate God, but, on the other hand, "he who loves God cannot endeavour that God should love him in return.' Goethe, who admired Spinoza without even beginning to understand him, thought this proposition an instance of selfabnegation. It is nothing of the sort, but a logical consequence of Spinoza's metaphysic. He does not say that a man ought not to want Cod to love him; he says that a man who loves God cannot want God to love him. This is made plain by the proof, which says: "For, if a man should so endeavour, he would desire (V, 17, Corol.) that God, whom he loves, should not be God, and consequently he would desire to feel pain (III, 19), which is absurd (III, 28)."

우선 전자에 대해
, 원문은 'ought not to'와 'cannot'이다. 'ought not to'는 '바라지 말아야 한다'가 맞는데, 'cannot'은 '(신의 사랑을 바라면 이후의 논증과 같이 논리적인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에) 바랄 수가 없다'라고 해야 할 듯하다. 그리고 후자는 원문에 따르면 '자신이 사랑한 신이 신이 아니게 되길 바라는 것이 되고'라는 뜻이 된다. 신이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번역문은 '신이 고통을 느끼기를 바라는 셈'이 된다고 했는데, 원문은 '그가 (자기가 믿는 신이 신이 아니게 되므로) 고통을 느끼기를 바라는 셈'이다. 주어가 'God'이 아니라 'he'니까, 신이 고통을 느끼는 게 아닌 것 같다. '신이 고통을 느끼길 바란다'라면 'he would desire God to feel pain'이 맞지 않나?


(도덕의 기초를 수학, 과학적 추론으로 이끌어낼 수 있음을 주장하며) ... 그리고 나는 예정된 방법이 그 양태들의 일치와 불일치를 검토하거나 추적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 양태들이 증명될 수 없다는 이유를 모르겠다. p.787

읽고서 대체 뭔 말을 하려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 and I cannot see why they should not also be capable of demonstration, if due methods were thought on to examine or pursue their agreement or disagreement.

사전을 보면 'due'에는 '예정된'이란 뜻 말고도 '정당한, 충분한'이란 뜻도 있다. 그러니까 다시 번역하면 '만일 그 양태들의 옳고 그름을 검토할 정당한 방법이 고안될 수 있다면, 그 양태들이 증명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쯤 되겠다.


(로크의 '인간은 오직 쾌락만을 욕구한다'는 주장을 반박하며) 로크의 논증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우리는 오로지 쾌락만을 욕구한다. 하지만 사실상 많은 사람은 쾌락 자체가 아니라 가까운 쾌락을 추구한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쾌락 자체를 욕구하기 때문에 악하다는 학설과 모순을 일으킨다." 철학자들은 대부분 각각의 윤리 체계 안에서 먼저 거짓인 학설을 단언하고, 그 학설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행동은 악하지만 문제의 학설이 참이었다면 악한 행동은 불가능했으리라고 주장한다. 로크는 이러한 유형에 속한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p.788

읽으면서 뭔 소릴 하려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특히 굵은 글씨) 원문을 참조했으나, 원문도 좀 복잡했다. 원문을 한참 들여다보고, 내가 이해한 바에 따라 다음과 같이 풀어 써 보았다. 하는 김에 내용이 연결되는 앞부분도 풀어 썼다.

In the first place, to say that men only desire pleasure is to put the can before the horse. Whatever I may happen to desire, I shall feel pleasure in obtaining it; but as a rule the pleasure is due to the desire, not the desire to the pleasure. It is possible, as happens with masochists, to desire pain ; in that case, there is still pleasure in the gratification of the desire, but it is mixed with its opposite. Even in Locke's own doctrine, it is not pleasure as such that is desired, since a proximate pleasure is more desired than a remote one. If morality is to be deduced from the psychology of desire, as Locke and his disciple* attempt to do, there can be no reason for deprecating the discounting of distant pleasures, or for urging prudence as a moral duty. His argument, in a nutshell, is: "We only desire pleasure. But, in fact, many men desire, not pleasure as such, but proximate pleasure. This contradicts our doctrine that they desire pleasure as such, and is therefore wicked." Almost all philosophers, in their ethical systems, first lay down a false doctrine, and then argue that wickedness consists in acting in a manner that proves it false, which would be impossible if the doctrine were true. Of this pattern Locke affords an example.

우선, 인간이 오직 쾌락만을 욕구한다는 것은 말 앞에 마차를 놓는 격이다. 내가 무언가를 욕구하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얻는 데에서 쾌락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쾌락이 욕구에 의한 것이지, 욕구가 쾌락에 의한 것은 아니다 (욕구를 충족하는 것에서 쾌락이 발생하니까, 쾌락은 욕구의 결과이지 욕구의 원인이 아니라는 뜻인 듯). 마조히스트들이 그러하듯, 고통을 욕구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 이 경우에도 고통이 혼재하긴 하지만, 욕구의 충족으로 인해 쾌락이 발생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로크 자신의 학설에서도, 욕구하는 것은 쾌락 자체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쾌락인데도) 가까운 쾌락을 장래의 쾌락보다 더 욕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쾌락뿐만 아니라 고려해야 할 또다른 요소가 있다는 것). 만일 로크와 그 제자들이 시도한 것처럼 도덕성을 욕구의 심리에서 연역한다면, 장래의 쾌락을 (가까운 쾌락보다) 저평가하는 것을 비난하거나 신중함을 도덕적 의무라 주장할 수 있는 이유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욕구 심리는 장래의 쾌락을 저평가하고, 가깝고 즉각적인 쾌락을 더 좋아하니까). 로크의 논증은 요컨대 이렇다. "사람들은 쾌락만을 욕구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쾌락 자체만을 욕구할 뿐 아니라, (똑같은 쾌락인데도 먼 미래의 쾌락보다) 가까운 쾌락을 더 욕구한다. 이는 사람들은 쾌락 자체만을 욕구한다는 우리의 학설과 모순되며, 따라서 (사람들이 가까운 쾌락을 더 좋아하는 것은) 악하다."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윤리 체계를 수립할 때, 우선 틀린 학설 (이 경우 '사람들은 쾌락만을 욕구한다') 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학설이 틀림을 보여 주는 행동 (이 경우 '사람들은 가까운 쾌락을 더 욕구한다') 이 악함을 논증한다. 이는 학설이 참이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학설이 참이라면 그 학설이 틀림을 보여 주는 예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로크는 이러한 유형의 한 예이다.

주어를 생략한 곳도 있고
, 관계대명사가 연달아 나와서 복잡하긴 하다. 하지만 이렇게 번역하는 게 논리 흐름상 맞지 않나 싶다. 솔직히 이 부분은 나도 자신 없다(...) 지적 환영.


(버클리의 논증을 들며) 이는 오류 추론에 해당하는데, 다음의 논증과 유사하다. "삼촌이 없다면 조카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A씨는 조카이다. 그러므로 A씨에게 삼촌이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다." 물론 A씨가 조카라는 사실은 논리상 필연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A씨를 아무리 분석해도 앞의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p.829

There is here a fallacy, analogous to, the following: "It is impossible for a nephew to exist without an uncle; now Mr. A is a nephew; therefore it is logically necessary for Mr. A to have an uncle." It is, of course, logically necessary given that Mr. A is a nephew, but not from anything to be discovered by analysis of Mr. A.

'
It is, of course, logically necessary given that Mr. A is a nephew'라는 문장에서 'is'에 연결되는 단어는 'given'이 아니라 형용사 'necessary' 아닌가? 만일 번역문에 나온 뜻대로라면 'It is logically neccesarily given that...' 하는 식으로, 부사 'necessarily'를 썼겠지. 그러니까 이 부분은 '이것은 A씨가 조카라는 것이 사실임이 주어진다면 당연히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만, A씨에 대한 분석에 의해 발견할 수 있는 다른 사실이 주어진다면 필연적이지 않다.' 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우주가 분리될 수 없는 전체임을 논증하는 비유를 들며) 당신은 분명히 모순에 빠지지 않으면서 A가 아저씨라고 말해도 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우주가 아저씨라고 말한다면, 스스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만다. 그런데 아저씨는 조카를 둔 남자이며, 조카는 아저씨와 분리된 사람이다. 그러므로 아저씨는 실재 전체일 수 없다. p.925

You may say, without apparent contradiction, that Mr. A is an uncle; but if you were to say that the Universe is an uncle, you would land yourself in difficulties. An uncle is a man who has a nephew, and the nephew is a separate person from the uncle ; therefore an uncle cannot be the whole of Reality.

원문에는 '그런데'에 해당하는 접속사가 없다
. 이 문장은 앞의 '스스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만다'는 이유를 부연 설명해 주는 문장인데 여기다 난데없이 '그런데'라는 접속사를 넣어 사람 헷갈리게 하고 있다. 그리고 'uncle'이 여기서는 '조카를 둔 남자'라는 뜻으로 쓰인 만큼, '아저씨'보다는 '삼촌'이라고 번역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앞에서는 삼촌으로 번역했으면서 왜 여기서는 아저씨라 그래?


전쟁은 긍정적인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 "전쟁은 제한적인 결정요인들을 안정시키는 쪽으로 국민의 건전한 도덕심을 무차별적으로 보존한다.” p.936

War has a positive moral value: "War has the higher significance that through it the moral health of peoples is preserved in their indifference towards the stabilizing of finite determinations."

"전쟁을 통하여
유한한 결정상태를 안정시키는 데 미련갖지 않음으로써 국민의 도덕적 건전함이 보존된다는 점에서, 전쟁은 큰 의의가 있다." 'indifference'는 어디다 팔아먹었어? 그리고 대체 '무차별적으로'란 말은 왜 넣은 거래?


(존 스튜어트 밀의 논증을 반박하며) 그는 어떤 사물이 보일 수 있다can면 그것을 '볼 수 있지만', 욕구되어야ought만 그것은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욕구의 대상에서 바람직한 대상을 도출해서는 안 된다. p.983

He does not notice that a thing is "visible" if it can be seen, but "desirable" if it ought to be desired. Thus "desirable" is a word presupposing an ethical theory; we cannot infer what is desirable from what is desired.

'이와 같이 '바람직하다'는 단어는 윤리 이론을 전제한다'는 문장을 빼먹었다.



* 추가 - 위 내용을 을유문화사에 메일로 보냈는데, 다음 쇄부터 수정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다음 쇄부터는 오역 없는 좋은 철학 입문서가 될 수 있기를...

Posted by 크리스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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